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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성 요리연구가 대학교수 제2대 궁중음식 인간문화재

일대기 황혜성은 1920년 7월 5일 충청남도 천안에서 아버지 황희승과 어머니 진흥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황혜성의 집안은 천석꾼을 될 정도로 큰 부자였으나 어머니가 31세가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황혜성은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몸이 무척 약했던 황혜성은 다행히 어머니의 지극 정성인 보살핌을 받아 응석받이로 자라게 되었고 보통학교 조차 혼자의 힘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학교조차 두꺼비라고 불리는 머슴의 등에 업혀 다녔고 시험지에는 이름조차 쓸 줄 몰랐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황혜성의 어머니를 학교로 불렀고 황혜성은 1년동안 학교를 쉬게 되었습니다. 황혜성의 어머니는 황혜성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키우려고 무척 애를 썼고 1년 후 다시 학교에 간 황혜성은 가만히 앉아서 하는 ..

위인 2023.07.28

이경재 신부 성 라자로 마을 세상에서 버려진 나환자들의 보금자리

일대기 이경재는 1926년 3월 황해도 서흥군 도면 능리에서 아버지 이상호, 어머니 원대희 사이에서 3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이경재의 부모님은 믿음이 깊어서 이경재가 태어나기도 전에 첫째는 꼭 사제로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까지도 이경재는 신부가 될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5학년이 되던 해 경성의 계성 초등학교로 옮기면서 교리를 가르치던 노기남 신부님을 만났고 노기남 신부를 비롯한 주변의 권유로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당시에는 나병(한센병)을 가진 환자들을 소록도, 여수 애양원, 대구 애락원 등에 격리해두었는데다가 일반 사람들은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기에 1945년 해방의 소식도 8개월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환자가 모두 병을 옮기는 것..

위인 2023.07.27

김용기 기독교 농촌지도자 가나안 농군학교 한국의 그룬트비

일대기 김용기는 1909년 9월 5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봉안 마을에서 아버지 김춘교와 어머니 김공윤 사이에서 다섯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김용기가 2살 되던 해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로 꿈쩍을 하지 못했고 용하다는 의원들을 불러도 치료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은 당시에 마을에 들어온 기독교 전도사가 집마다 놓고 간 종이 쪽지의 영생이라는 글을 보고서는 간절히 엎드려 기도를 했습니다. 부모님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김용기의 병은 깨끗이 나았고 그 후로 부모님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김춘교의 집안은 양반 가문인 안동 김씨였는데, 기독교를 믿으며 제사란 허례허식에 지나지 않다며 살아 계실 때 어른들을 잘 모시기로 결정했고 전보다 더 정성을 다해 어르신들께 효도하고 공경하는 ..

위인 2023.07.26

장기려 의사 사회사업가 가난한 환자들의 아버지 한국의 슈바이처

일대기 장기려는 1911년 음력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의 삼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장기려의 할아버지가 큰 부자였던 덕분에 물려받은 재산으로 어렸을 때의 살림은 넉넉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장기려는 본인도 몸이 약했고 병을 앓으면서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받고 죽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에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927년 송도 고등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시기에 장기려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집안은 기울어졌지만 장기려는 열심히 공부하여 수업료가 비교적 저렴했던 경성 의학 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장기려는 안과나 내과를 전공할 생각을 했지만 장인이 될 내과의사 김하식의 권유에 따라 외과를 ..

위인 2023.07.25

안익태 작곡가 애국가를 보급한 우리나라 최초의 지휘자

일대기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안익태의 부모님은 여인숙을 경영했고 안익태는 7형제와 함께 자랐습니다. 안익태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교회에 찾아가 풍금 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1913년 큰형 안익삼이 일본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비싼 돈을 주고 바이올린을 사와서 안익태에게 선물로 주었고 6개월쯤 지나자 교회에서 들었던 찬송가 선율을 쉽게 연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1914년 평양 종로 보통학교에 입학한 안익태는 어느날 트럼펫 소리를 듣고 트럼펫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1918년 안익태는 평양 숭실 중학교에 입학했고 마우리 박사의 추천으로 숭실 대학부 오케스트라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안익태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

위인 2023.07.24

석주명 생물학자 한국의 파브르 곤충학의 대가

일대기 석주명은 1908년 11월 13일 평안남도 평양 이문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석주명의 아버지는 평양에서 가장 큰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석주명과 형제자매들은 모두 동물을 좋아해서 다양한 동물들을 집에서 키웠습니다. 또한 석주명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겠다는 열정이 대단했고 나이를 속여가며 학교에 기어코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간곡한 요청으로 담임 선생님도 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해주었습니다. 그리고 1921년에는 민족학교이자 사립학교인 평양 숭실 중학교에 입학했고, 특히 애국가를 작곡한 선배 안익태와 함께 연극반 활동을 했습니다. 남학생만 다니는 학교였기에 연극반이었고 어리고 체구도 작았던 석주명은 주로 여자 역할을 많이 했고 역할을 곧잘 해내서 선배들과 관객들..

위인 2023.07.23

이상백 체육인 사회학자 독립운동가 우리나라 올림픽의 아버지

일대기 이상백은 1903년 8월 5일 대구에서 아버지 이시우와 어머니 김신자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07년 5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큰아버지 이일우 밑에서 자랐고 큰아버지가 세운 우현서루와 강의원에서 서양 학문도 배웠습니다. 이상백의 집안은 양반이긴 했으나 사회적 신분이나 크게 내세울 것은 없던 중간 정도의 집안이었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땅을 많이 가진 지주였기에 집안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특히 큰아버지 이일우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교육 및 독립운동에 기부한 애국자였습니다. 어머니 또한 대구 지역 여성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이상백의 4형제 모두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었고 용봉린학(용 봉황 기린 두루미), 4천왕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특히 이상백의 둘째 형이상화는 ..

위인 2023.07.21

유일한 기업인 독립운동가 민족기업 유한양행

일대기 유일한은 1895년 1월 15일 평양에서 아버지 유기연과 어머니 김기복의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유일한의 아버지는 평양에서 장사를 했고 아명은 일형이었습니다. 유일한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우리 땅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전투를 벌였고 유일한의 부모님은 가게 문을 닫고 피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은 일찍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국민들이 투표하여 뽑은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습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평양으로 온 미국인 선교사가 총명한 조선 소년을 미국으로 보내 공부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고 유기연은 열살이 된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내 공부시키기로 했습니다. 어머니의 완고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도..

위인 20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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