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김용기 기독교 농촌지도자 가나안 농군학교 한국의 그룬트비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26. 08:17
728x90
SMALL

[출처:김용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김용기는 1909년 9월 5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봉안 마을에서 아버지 김춘교와 어머니 김공윤 사이에서 다섯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김용기가 2살 되던 해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로 꿈쩍을 하지 못했고 용하다는 의원들을 불러도 치료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은 당시에 마을에 들어온 기독교 전도사가 집마다 놓고 간 종이 쪽지의 영생이라는 글을 보고서는 간절히 엎드려 기도를 했습니다. 부모님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김용기의 병은 깨끗이 나았고 그 후로 부모님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김춘교의 집안은 양반 가문인 안동 김씨였는데, 기독교를 믿으며 제사란 허례허식에 지나지 않다며 살아 계실 때 어른들을 잘 모시기로 결정했고 전보다 더 정성을 다해 어르신들께 효도하고 공경하는 김춘교의 모습을 보며 집안 어르들과 마을 사람들도 차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김용기는 1915년 7세 되던 해 마을 서당에 들어가서 명심보감, 소학, 통감 등을 배웠고 책에서 배운대로 예의를 갖추고 성실하게 지낸 덕분에 마을의 어른들은 김용기를 칭찬하곤 했습니다.

 

1922년 열네살이 된 김용기는 경기도 양주군 광동 학교에 들어갔고 나라와 민족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실에도 눈을 떴고 세계 정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김용기가 스물세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공부한 사람일수록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업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김용기 또한 평소 아버지의 생각에 공감을 하고 있었기에 농사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하고 종자를 개량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한편 김용기는 농사꾼을 천대하는 것은 글 읽는 것을 오직 출세의 수단으로 삼고 벼슬에 오른 뒤에는 당파 싸움만 하던 양반 계급이 만든 잘못된 전통이라고 반박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며 얻는 지혜와 이치를 통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 2년 만에 김용기는 동네에서 농사를 가장 잘 짓게 되었고 자신감을 얻은 김용기는 교회가 있고 사람들 모두 형제가 되어 즐겁게 일하는 곳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2년 동안 공사판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며 번 돈을 갖고 친구가 가져온 금 표품석이 나온 청계산 금광을 구입해서 광부들과 함께 금광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1년을 넘게 팠지만 금은 보이지 않았고 그 표품석이 다른 광산에서 캐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김용기는 갖고 있던 물품까지 모두 팔아 일꾼들의 임금을 주고 광산에서 물러났습니다.

 

김용기는 포기하지 않고 돈을 빌려서 마을 너머에 있는 돌산 3천 평을 구매했고 거칠던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심었던 과일나무들은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김용기가 미쳤다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김용기가 일구어놓은 땅을 보고 감탄하며 따르게 되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함께 일구는 논밭은 물론 과수원도 늘어났습니다.

특히 애국지사, 징병을 피해 도망친 젊은이들이 김용기가 있던 봉안 마을로 많이 도망을 왔는데, 그 중에는 민족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여운형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김용기는 1944년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에서 도내 농민 대표들을 모아 일제가 가져가는 벼 대신 바치지 않아도 되는 고구마 농사를 짓고 전쟁터에 끌려갈 사람들을 서로 바꾸어 숨겨주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해방 후 김용기는 신탁 통치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써서 학생들을 동원해 시내 곳곳에 뿌렸고 사상이 의심스러운 문서를 뿌렸다는 죄로 5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변호사들이 미군의 하지 중장에게 탄원서를 낸 덕분에 13일만에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용기는 혼란스러운 나라의 형편과 세력 다툼만 벌이는 정치에 실망과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1946년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 자하문 밖에 1만 평이 넘는 과수원의 주인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버려졌다는 얘기를 듣고 김용기는 고향에 있던 자신의 농장을 팔고 버려진 과수원을 구매했습니다.

 

온 가족이 폐허가 된 과수원을 다시 되살렸고 김용기의 살림집을 예배 장소로 정했습니다. 3년 반이 지나자 기름진 땅이 되었고 조병옥, 함석헌 등 사회 지도자들과 많은 단체에서 찾아와 칭찬을 마지 않았고 그 중 유재헌 목사가 구입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김용기는 그 자리에서 돈을 덜 받는 대신 교회를 세워달라는 부탁을 하며 유재헌 목사에게 과수원을 내어주었지만 한달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유재헌 목사는 인민군에게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구기리의 과수원도 봉안의 이상촌도 모두 파괴되었지만, 김용기는 포기하지 않고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사암리 땅을 구매하여 새로 땅을 일구고 에덴향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에덴향에 세운 복음 고등 농민 학원의 학생들 수도 점차 늘어가고 땅도 기름지게 되었습니다. 학생들과 주민들은 일하는 자만이 먹을 수 있다 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진정한 노동의 가치와 보람을 느꼈습니다.

 

김용기는 경기도 광주군 황산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가나안 농군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러는 한편 농촌 계몽운동과 중학교 일반 교과 과정과 농업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일도 병행했습니다. 김용기의 가족은 학비를 전혀 받지 않고 모두 선생님이 되어 열심히 가르쳤고 아이들을 상급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부모들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1966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1973년에는 제1회 인촌 문화상과 새마을 훈장 협동장을 받았습니다.

 

1973년 김용기는 평생의 꿈이던 가나안 복민회, 제2 가나안 농군학교, 복민 교육원 등을 차례로 세웠고 사람들에게 바르게 살아갈 길을 밝히고 알리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김용기는 한국의 그룬트비라고 불렸습니다. 참고로 그룬트비는 덴마크를 선진 농업국이자 민주 국가로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정신으로 몸으로써 실천했던 김용기는 1998년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후

 

1990년 일가(김용기의 호) 김용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일가 기념상을 만들었습니다.

 

 

728x90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