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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재 신부 성 라자로 마을 세상에서 버려진 나환자들의 보금자리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2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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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라자로 마을 *출처: 성 라자로 마을 홈페이지

 

 

일대기

 

이경재는 1926년 3월 황해도 서흥군 도면 능리에서 아버지 이상호, 어머니 원대희 사이에서 3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이경재의 부모님은 믿음이 깊어서 이경재가 태어나기도 전에 첫째는 꼭 사제로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까지도 이경재는 신부가 될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5학년이 되던 해 경성의 계성 초등학교로 옮기면서 교리를 가르치던 노기남 신부님을 만났고 노기남 신부를 비롯한 주변의 권유로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당시에는 나병(한센병)을 가진 환자들을 소록도, 여수 애양원, 대구 애락원 등에 격리해두었는데다가 일반 사람들은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기에 1945년 해방의 소식도 8개월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환자가 모두 병을 옮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나병을 무조건 병을 옮기는 전염병이라고만 생각해서 무조건 피하려고 했습니다.

 

해방 후에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미군정은 1948년 인천 동인 요양소를 세우고 떠도는 나환자들이 모여 살 곳을 마련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인 요양소로 모여드는 나환자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고 따로 나가 살겠다는 나환자들의 대표는 가톨릭 재단의 조지 캐롤 주교를 만났습니다.

 

세계 가톨릭 구제회와 함께 나환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던 캐롤 주교는 1950년 6월 2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신기촌에 성 라자로 요양원을 만들었지만 이내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1948년 서울 대교구에서 세브란스 병원 부속 결핵 요양소로 사들였던 곳을 1951년 캐롤 주교가 다시 사게 되었습니다. 이

곳이 바로 현재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모락산 기슭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입니다.

 

성서 누가복음에서 종기 투성이의 거지 라자로(16장 19절) 에 나오는 라자로의 이름을 따왔고 예수님은 나환자들을 무척 사랑하며 다시 살려 준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성 라자로 마을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1951년 이경재는 수원 북수동 성당에 임시 보좌 신부로 있었는데 이 때 처음으로 성 라자도 마을에 대해 듣게 되었고 

나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나환자들을 보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캐롤 주교는 성 라자도 마을 업무 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이 있었기에 나환자들은 이경재 신부가 자신들을 돌보아주길 바랬고 이경재 신부도 성 라자로 마을에 제1대 원장으로 들어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전쟁 중에 구제 물자를 받기 위해 노력하던 이경재 신부는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데가 결핵까지 걸려 1년 3개월 만에 마을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경재는 우선 결핵 치료에 전념했고 병이 나은 다음에는 서울 흑석동의 명수대 성당 주임 신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경재 신부는 성 자라로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지만 노기남 주교는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경재는 1961년에 한국 교회를 돕기 위해 미국으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마음 한쪽에는 늘 성 라자로 마을이 있었고 수원 교구장 윤공희 주교와 서울 교구의 김수환 (당시 대주교)에게도 편지를 보내 허락을 얻었고 결국 자신이 속한 서울 교구의 최종 복귀 허락도 받아내었습니다.

 

1970년 3월 3일 마침내 성 라자로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제7대 원장 신부로 다시 부임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알게 된 신부님들은 이경재에게 후원금을 보내주었고 1971년에는 정식으로 라자로 돕기회도 만들었습니다.

 

정부에서도 성 라자로 마을에 대해 관심을 갖고 1972년부터 보조금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도 성 라자로 마을을 유지하는 비용의 절반 정도는 외국에서 보내주는 후원금에 해당됐습니다.

 

이경재는 성 라자로 마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라고 생각했기에 신문과 방송 등으로 나환자들의 삶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통령 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의 도움으로 공동 이발소와 목욕탕이 있는 정결의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이경재는 미감아(나환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나병은 유전이 아님)들이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보육원에서 자라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아이들의 교육이나 입양 문제에 대해서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도움을 구한 덕분에 미국에서의 입양 허락도 받아내고 대한 항공에서는 아이들의 비행기 표를 무상으로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한국 나병 연구원이 마을에 건립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1973년은 스웨덴 다미앙 신부가 나환자 마을이었던 몰로카이 섬을 찾아가 선교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이경재는 마을에 다미앙 신부를 기념하는 성당을 세울 것을 계획했습니다.

 

다미앙 신부가 속해있었던 로마의 예수성심 성모성심 수도원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고 총장 신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일본 후지자와 시의 성심 수녀회를 찾아가서도 후원을 받게 되었고 1975년 마침내 성 라자도 마을에 새 성당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나환자들이 일반인들과 함께 미사를 볼 수 있도록 하였고 신앙적으로는 차별이 없는 공간을, 의학적으로는 나병의 전염을 예방할 수 있도록 입구와 앉는 자리를 따로 배치해두었습니다.

 

 

 

이경재는 입양조건이 맞지 않아 마을에 남게 된 아이들을 돕기 위해 나환자 돕기 자선 음악회인 그대 있음에 를 준비했습니다. 1975년 서울 정동 문화 체육관에서 시작했지만 반응이 점점 줄어들었고 다행히 서울대학교 이경숙 교수의 도움으로 1985년 재개 되었습니다. 

 

1990년 성 라자로 마을이 생긴 지 40년이 되었을 때 기념 음악회로서 처음 수익금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익금의 절반은 우리나라 나환자들을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나환자들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1985년 우리나라에 가톨릭 교회가 들어온지 20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이경재는 나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안과, 성형 수술 등 필요한 의료 지원을 받기 위해 국내외로 다니며 도움을 요청했고 나환자들에게 새 삶을 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1973년 3월 18일에 처음 시작된 백만인 걷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1983년에는 보건사회부 사회단체로 정식 등록하고 수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성 라자로 마을과 같은 가난한 시설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진행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84년 제11회 대회를 끝으로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무리하게 일을 많이 했던 이경재는 결국 심장병으로 쓰러지게 되었고 1998년 5월 11일 결국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1998년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1999년 이경재 신부의 흉상이 세워지고 제17회 그대 있음에 자선 음악회가 공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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