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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작곡가 애국가를 보급한 우리나라 최초의 지휘자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2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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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익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안익태의 부모님은 여인숙을 경영했고 안익태는 7형제와 함께 자랐습니다.

 

안익태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교회에 찾아가 풍금 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1913년 큰형 안익삼이 일본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비싼 돈을 주고 바이올린을 사와서 안익태에게 선물로 주었고 6개월쯤 지나자 교회에서 들었던 찬송가 선율을 쉽게 연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1914년 평양 종로 보통학교에 입학한 안익태는 어느날 트럼펫 소리를 듣고 트럼펫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1918년 안익태는 평양 숭실 중학교에 입학했고 마우리 박사의 추천으로 숭실 대학부 오케스트라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안익태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마우리 박사는 경성 YMCA 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캐나다 선교사 조지 그레그에게 안익태를 소개시켜주었고 첼로를 배울 수 있게 했습니다. 조지 그레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첼로를 들여온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1919년 안익태는 독립운동을 돕는 일을 하다가 발각된 일본 순사들한테 쫓기다 다쳐 평양 기독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마우리 박사가 안익태의 신원을 보증해주고 음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형사 주임에게 간곡히 부탁한 끝에 음악 공부만 한다면 일본에 갈 수 있는 도항증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1919년 10월 안익태는 결국 일본 도쿄로 향했고 형 안익삼을 만나 음악 학원에서 첼로와 바이올린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1921년 안익태는 도쿄 세소쿠 중학교 교장의 눈에 들었고, 1학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26년 세소쿠 중학교를 졸업한 안익태는 도쿄 국립 음악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독일 교수 베르크 마에스터는 안익태의 재능을 알아봤고 입학한지 2개월 만에 안익태는 일본 주요 도시를 돌며 첼로 독주회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26년 7월 조국으로 돌아가 연주회를 열 수 있게 된 안익태는 설레었습니다. 졸업식 때 많이 불렀던 이별의 노래인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연주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민족의 설움을 느끼고 흐느꼈습니다.

 

1928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인숙 운영도 잘 안되자 집안 형편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졌고 안익태는 1년 학비가 밀려있어 졸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알고 지내던 미국 교수 핸포드가 안익태의 딱한 사정을 듣고 밀린 학비를 대신 내주어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졸업식과 연주회를 마친 뒤 고국으로 돌아온 안익태는 일본 순사들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1932년 안익태는 꿈에 그리던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 첼로 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동양 사람들을 우습게 보던 백인들도 안익태의 연주를 들으면 동양 사람을 새롭게 보곤 했습니다.

그해 9월 안익태는 신시내티 음악원에서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으로 옮겨갔고 관현악법과 작곡법 또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2년이 지난 1934년에는 앱나키 캠프라는 청소년 음악 캠프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였고 1935년에는 이팔청춘과 아리랑 고개를 작곡했습니다.

또한, 애국가를 작곡 하기로 마음 먹은지 5년 만에 완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익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국가를 가리지 않고 애국가의 악보를 보냈고 애국가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안익태는 자신이 작곡한 한국 환상곡에 애국가 선율을 넣었고 1938년 더블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아일랜드 또한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을 한 상태였고 우리 민족의 아픔을 담은 선율에 그들 또한 감동하였습니다.

 

안익태는 독일이 낳은 최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고 싶어 저택을 기웃거리다가 정원에 있던 손녀가 연못에 빠지자 아이를 구했고 슈트라우스와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안익태는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되었고 지휘법과 작곡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1939년 한 해동안은 스승 슈트라우스를 대신해 불가리아, 유고 슬라이바, 부다페스트, 로마 등 유럽 각지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1940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1944년 안익태는 슈트라우스 탄생 80주년 기념으로 열린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직접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8월 프랑스 파리에서 연주를 마치고 빈으로 돌아가려할 때 연합군과 독일의 전쟁이 곧 터질 것이라는 뉴스가 전해졌고, 하는 수 없이 에스파냐(스페인) 대사를 따라 마요르카 섬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곳에서 안익태는 아내 로리타 탈라베라(로리타 안) 을 만나게 되어 결혼을 했고 마요르카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오케스트라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1948년에는 애국가가 우리나라의 정식 국가가 되었습니다.

 

 

 

1955년 안익태는 꿈에 그리던 조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1960년에는 일본에서 한국 환상곡이 울려 퍼졌고 한국 교포들과 일본 사람들이 그의 연주회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안익태는 1961년 다시 우리나라를 방문했고 정부에 해마다 다른 나라의 연주자들을 서울에 불러들여 국제 음악제를 열고 음악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으나 국제음악제는 세 번 열린뒤 흐지부지 되었고 더 이상 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되어 결국 에스파냐로 돌아갔습니다.

 

중남미 순회 연주 일정을 소화하던 안익태는 간경화증으로 바르셀로나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1965년 9월 16일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1965년 10월 한국 정부에서 안익태에게 문화 훈장을 수여했고 

 

1977년 7월 안익태의 유해를 조국 땅에 묻기 위해 아내 로리타 안이 한국을 방문했고 안익태는 국립 현중원에 안장되었습니다.

 

1993년 제1회 안익태 음악회가 열리고 안익태 작곡상이 제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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