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이상백 체육인 사회학자 독립운동가 우리나라 올림픽의 아버지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21.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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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상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이상백은 1903년 8월 5일 대구에서 아버지 이시우와 어머니 김신자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07년 5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큰아버지 이일우 밑에서 자랐고 큰아버지가 세운 우현서루와 강의원에서 서양 학문도 배웠습니다.

 

이상백의 집안은 양반이긴 했으나 사회적 신분이나 크게 내세울 것은 없던 중간 정도의 집안이었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땅을 많이 가진 지주였기에 집안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특히 큰아버지 이일우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교육 및 독립운동에 기부한 애국자였습니다. 어머니 또한 대구 지역 여성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이상백의 4형제 모두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었고 용봉린학(용 봉황 기린 두루미), 4천왕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특히 이상백의 둘째 형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시로 유명한 항일 시인이었습니다.

 

이상백은 1915년 대구 고등 보통학교에 들어갔고 야구부 투수와 테니스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1921년 도쿄 와세다 고등학원에 들어갔을 때부터는 육상과 농구를 하게 되었고, 1924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들어가 사회 철학 공부도 했습니다.

 

 

 

또한, 1927년에는 와세다 대학원의 사회학과 동양학을 연구했고 대학농구팀의 감독까지 맡은 이상백은 미국 원정을 이루어냈습니다. 1928년에는 일본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하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1930년 이상백은 젊은 대학 농구인들을 하나로 뭉쳐 일본 농구협회를 만들었고 그해 말에는 일본 체육 협회 이사가 되었습니다. 1932년 이상백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대표 선수단 본부 임원으로 참가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일본 대표 선수단의 총무를 맡았습니다.

 

이 당시 우리나라 선수들의 세계 대회 출전을 위해 이상백은 누구보다 힘을 썼고 마라톤의 손기정, 남승룡을 비롯해 농구 권투 축구 등 몇몇 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상백은 언제나 당당하게 일본 사람들을 대하며 민족의 자존심을 키졌고 주장이 올바르고 몸가짐이 깨끗했기 때문에 일본 스포츠계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1939년 이상백은 일본 체육계 일을 그만두고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고 1944년에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 동맹에 들어가 독립 운동에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민족 지도자들이 암살을 당하고 폭력이 판니는 정치계를 보고 실망하여 완전히 떠나게 됩니다.

 

1945년 초종로 YMCA 에서 조선 체육 동지회를 만들었고 1946년 올림픽 대책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1947년에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 가입을 하여 1948년 런던 올림픽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다른 한편, 이상백은 한국 사회학을 처음 시작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하거나 이조 건국의 연구라는 책도 펴내어 현재까지 국사학에서도 널리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1945년부터는 경성대학교(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주임 교수, 진단학회 위원장, 국사 편찬 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1964년 이상백은 이기붕에 이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두 번째로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이 되었지만, 1966년 연구실에서 강의를 준비하던 이상백은 가슴에 충격을 느꼈고 결국 심근 경색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후

 

1970년 정부에서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고

 

1976년 서울대학교, 대한 올림픽 위원회, 진단학회가 함께 이상백 10주기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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