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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기업인 독립운동가 민족기업 유한양행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2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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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일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유일한은 1895년 1월 15일 평양에서 아버지 유기연과 어머니 김기복의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유일한의 아버지는 평양에서 장사를 했고 아명은 일형이었습니다.

 

유일한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우리 땅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전투를 벌였고 유일한의 부모님은 가게 문을 닫고 피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은 일찍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국민들이 투표하여 뽑은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습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평양으로 온 미국인 선교사가 총명한 조선 소년을 미국으로 보내 공부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고 유기연은 열살이 된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내 공부시키기로 했습니다.

 

어머니의 완고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유일한을 기어이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1904년 유일한은 인천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고 대한제국의 순회 공사 임무를 맡은 박장현과 그 일행도 함께 있었습니다. 

 

 

 

유일한은 미국 네브래스카의 커니라는 작은 농촌 도시의 결혼을 안한 중년 자매의 집에 맡겨졌고 선교사가 준 영어 교재를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영어를 익혀나갔습니다.

 

당시 네브래스카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독일과 스웨덴에서 온 이민자들이었고 부지런하고 예의 바르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농민들이었습니다.

 

1905년 유일한을 돌봐주었던 자매는 유일한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고 겨우 말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을 다른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유일한은 더더욱 영어공부에 몰두하여 실력이 일취월장했습니다.

 

1909년 박용만은 커니 농장에 소년병 학교를 세웠고 미국에 와 있던 애국청년들과 유일한을 비롯한 소년들을 모아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소식을 듣고 유일한은 더더욱 성공해서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신문 배달을 시작한 유일한은 보급소 소장이 타자를 치다 오타가 나서 일형이 아닌 일한으로 이름을 입력했고 북간도로 피신해 냉면 장사를 시작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한 이라는 것이 대한사람이라는 뜻도 되고 발음하기도 좋아서 이름을 한으로 바꾸길 요청했습니다.

 

아버지는 대한 제일의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흔쾌히 승낙해서 이 때부터 유일한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유일한은 헤이팅스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축구부에 들어가 깜짝놀랄만한 활약으로 유명학생이 되었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유일한은 공부와 운동 모두 놓치지 않았으며 당당하고 리더십이 뛰어난 학생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1916년 유일한은 미시간 주립 대학 상과에 입학했고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국 사람들을 상대로 중국 상품을 파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유일한은 꽤 많은 돈을 벌었지만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는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조국에 돌아가 큰 기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푼도 낭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일한은 한 중 학생회 회장이 되었고 훗날 부인이 될 중국계 미국인인 호미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무렵 미국 필라델피아 한인 자유 대회에서 서재필을 만나게 되어 조국과 민족에 대한 마음을 한껏 더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0년 유일한은 미시간 중앙 철도 회사의 회계사로 취직했지만, 마음 속에는 사업의 뜻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내고 숙주나물을 공급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22년 디트로이트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대학 동창 윌레스 스미스와 함께 라초이 식품 회사를 열었고 1925년에는 호미리와 결혼을 했습니다. 호미리 또한 애국심이 강한 유일한을 따라 조선으로 가면 남편의 동포들을 위해 일을 하기로 약속해 왔습니다.

 

 

 

2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유일한은 미국에 벌여 놓은 사업을 정리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동포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업을 할 계획을 가족들에게 알렸습니다.

 

1926년 유일한 부부는 종로 2가에 있는 덕원 빌딩에 유한 양행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4년 만인 1929년 본사 사무실을 덕원 빌딩 건너편 YMCA 회관으로 옮겼고 미국의 여러 제약 회사와 거래를 맺었습니다.

 

또한 우리 농촌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특산품인 죽세공품, 도자기 등을 미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한양행은 제약회사로 나날이 번창해 나갔고 기존에 미국에만 의존했던 거래에서 벗어나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도 거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1936년 유일한은 유한 양행을 주식회사로 만들었고 많은 동포를 주주로 받아들이고 종업원들에게 회사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주식도 나누어주었습니다. 

 

유한 양행의 종업원들은 유일한의 기업 정신에 감동받아 스스로 자신이 애국자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과 미국의 전쟁이 심화되자 일본은 미국에 있던 유일한의 귀국길을 막고 세금과 임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동생 유명한이 대신 맡아 운영을 했고 유일한은 미국 전략 정보국 한국 담당 고문으로서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1946년 유일한은 드디어 귀국을 했고 대한 상공 회의소의 초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유일한은 유한 양행 사장으로 몸 담고 있으면서 여러 기업의 이익을 두루 챙기기 어렵다 판단했고 그동안 일을 도맡아 왔던 동생 유명한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년병 학교 동기 구영숙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한국 전쟁 발발로 인해 유한 양행의 기반이 잿더미가 되었고 1953년 다시 귀국길에 오르며 사장이 되어 유한 양행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려 공과 기술 학교를 세웠고 유한 교육 신탁 기금을 만들어 각 대학의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교육 사업에도 힘썼습니다.

 

유일한은 언제나 검소했고 자신은 기업의 일과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고 노력하는 일꾼일 뿐이라는 생각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유일한은 1968년 동탑 산업 훈장, 1970년 국민 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1971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일한의 유언장에는 모든 재산은 한 푼도 남김 없이 사회를 위해 좋은 일에 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후

 

1971년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습니다.

 

 

 

유일한 기념관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경인로 590 (괴안동 185-34)

 

유일한 박사 추모 35주기를 맞아 유한대학교 유일한기념관 1층에 유일한기념홀이 조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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