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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농학자 육종학자 농업 기술로 조국을 살린 한국인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1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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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출처: 나무위키

 

 

일대기

 

우장춘은 1898년 4월 8일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우범선은 조선의 군인이었고 일본인들의 음모에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것을 방조하게 되었고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우장춘의 어머니인 사카이 나카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범선은 1903년 조선에서 온 황국협회에서 온 고영근에게 살해를 당해 우장춘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1911년 우장춘은 히로시마 현의 구레 중학교에 들어갔고 졸업할 무련 조선 총독부에서는 도쿄 제국 대학 농학부에 진학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1916년 농학부 실과에 들어간 우장춘은 육종학의 기초 지식과 유전자에 대한 내용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1919년 조선 유학생들이 졸업을 앞둔 우장춘을 찾아와 조선 독립의 의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우장춘은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이러한 시대가 매우 괴롭게 느겨졌습니다.

 

결국 농학을 열심히 공부해 조국인 조선을 위해 일할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본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나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며 도쿄가 폐허가 되었고 일본 정부는 의도적으로 조선 사람이 불을 지르거나 도둑질을 일삼고 있다는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우장춘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을 느끼며 일본 사람보다도 뛰어난 육종학자가 되어 학문으로 승부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느날 옆집 아주머니가 아이의 공부를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봤고 우장춘의 어머니는 우장춘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우장춘은 다음날 부터 옆집 아이의 공부를 가르쳐주었고 1924년 아이의 이모인 고하루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1924년 사이타마 현의 고노스 농장이 완성되었고 1926년에는 우장춘도 가족을 데리고 고노스 농장으로 이사했습니다. 

우장춘은 나팔꽃 돌연변이를 비롯한 다양한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는데 1930년 전기 누전으로 농장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우장춘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자며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학문에서도 능력이 뛰어났고 후배들에게도 자상했기에 고노스 농장에서 우장춘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조선 사람이라 하여 아무도 우습게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우장춘이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고 하여 끝까지 기사로 승진시키지 않았습니다.

 

 

 

1935년 우장춘은 드디어 박사 학위 논문을 도쿄 제국 대학 농학부에 내었고 1936년 우수한 성적으로 결국 농학박사가 되었습니다.

 

꽃을 무척 좋아했던 우장춘은 1930년 무렵부터 꽃씨를 만드는 일에도 열중했고 1937년 다키이 종묘 회사로 이동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을 무렵 우장춘은 채소의 육종 기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는 육종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채소의 육종 기술을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은 계속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한국 정부 내에서도 아버지 우범선의 음모를 빌미로 우장춘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과 아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아니되며 우장춘 박사가 있어야 우리 농촌을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1950년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우장춘은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고 한국 농업 과학 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우장춘을 비롯한 연구원들은 남쪽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우장춘은 전쟁이 끝난 상황을 미리 예상하며 힘든 환경 속에서도 식량 보급을 위한 연구를 쉼없이 이어나갔습니다.
1952년 종자를 재배하기에 알맞은 장소를 진도로 정했고 1953년에는 한국 농업 과학 협회가 만들어졌습니다.

1957년에는 배추와 무를 수입하지 않고도 자급자족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58년에는 우장춘의 연구를 토대로 생산한 종자를 원활하게 보급하기 위한 농사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또한 수경 재배를 연구하여 미군에게 먼저 팔았고 폭발적인 주문에 따라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이내 깨끗한 야채가 한국인들의 식탁에도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연구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우장춘은 십이지장 궤양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고 수술을 거듭하면서 병세는 점점 나빠졌습니다. 

 

1959년 8월 9일 농림부 장관이 병원으로 와서 우장춘에게 대한민국 문화 포장 메달을 수여했고. 다음날인 8월 10일 의료진과 아내 고하루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1999년 10월 21일 우장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장춘 기념관이 완공되었습니다.

 

주소: 부산 동래구 우장춘로62번길 7

 

휴관: 매주 월요일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 1월 1일 / 설ㆍ추석 연휴

 

우장춘 기념관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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