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신재효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작가 이론가 연출가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17. 10:01
728x90
SMALL

[출처: 신오위장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신재효는 1812년 11월 6일 전라북도 고창 모양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신재효의 어머니는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생기지 않아 걱정했고 늘 허전한 마음이 있었는데, 초산 월출봉에 남편과 함께 가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한 탓인지 드디어 신재효를 갖게 되었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뜻으로 있을 재 在, 효도 효 孝 , 재효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신재효는 신동으로 소문이 날 만큼 총명하였고 아버지 신광흡은 학문은 물론 의학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어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통해 글 공부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신재효의 집안은 중인 신분이었기에 신분의 제약이 있었고 높은 관직까지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병이 깊어서 지극정성으로 수발을 들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행히 관약방(현재의 보건소 개념) 을 하던 아버지가 남겨 준 재산이 있었기에 살림살이는 넉넉한 편이었지만, 신재효는 항상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고 돌보았습니다.

 

 

 

1876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을 때 신재효는 자신의 곳간을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라에서도 정3품에 해당하는 통정대부라는 관직을 내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신재효의 정해진 신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재효는 신분의 굴레가 답답하게 느껴졌고 이 마음을 자신이 좋아했던 판소리로 풀어냈습니다. 신재효는 우선 짧는 노래인 단가를 지어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내 곧 판소리의 예술성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소리꾼들이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고 신분이 천하다하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신재효는 소리꾼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신재효의 사랑방인 동리정사에는 어느덧 판소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지만 서로 다 다른 방법으로 연구를 했기에 체계적이고 제대로 된 판소리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판소리 선생님이 부르는 것을 듣고 따라하는 방식으로 배웠는데 이를 구전심수 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전해져 내려오면서 이야기 내용이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신재효는 당시 명창이었던 이날치, 김세종, 박만순을 스승으로 모셨고, 명창들이 소리를 가르치고 자신은 이론에 대해 설명해주는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신재효에게 배운 사람들은 이야기의 내용을 정확히 알게 되었고 더 깊은 감정을 실어서 소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신재효는 여자 소리 꾼을 기르는 일도 진행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소리꾼으로 알려진 진채선을 교육했습니다.

 

1867년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새로 짓고 잔치를 벌이는 자리에 명창들을 초대했고 신재효는 진채선을 그 자리에 서게 하여 여자 소리꾼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대원군은 진채선을 국창이라고 부르고 한성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대원군은 진채선의 청을 받아들여 신재효에게 오위장이라는 벼슬을 내렸지만, 신재효는 진채선이 떠났다는 아쉬움이 더 컸고 그 때 지은 노래가 바로 도리화가 입니다.

 

 

 

신재효는 1884년 본인의 사랑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다섯 마당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를 정리했고 여생을 판소리 교육 및 보급에 바쳤습니다.

 

 

 

 

사후

 

1963년 신재효의 업적을 기리며 추념비를 세웠고

 

1990년에는 동리 국악당을 세웠습니다.

 

1998년 국립창극단에서 신재효의 일대기를 공연했고

 

2001년에는 고창에 판소리 박물관이 개관했습니다.

 

고창 판소리 박물관 *출처: 네이버

 

728x90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