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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의사 사회사업가 가난한 환자들의 아버지 한국의 슈바이처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2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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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출처: 나무위키

 

 

일대기

 

장기려는 1911년 음력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의 삼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장기려의 할아버지가 큰 부자였던 덕분에 물려받은 재산으로 어렸을 때의 살림은 넉넉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장기려는 본인도 몸이 약했고 병을 앓으면서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받고 죽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에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927년 송도 고등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시기에 장기려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집안은 기울어졌지만 장기려는 열심히 공부하여 수업료가 비교적 저렴했던 경성 의학 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장기려는 안과나 내과를 전공할 생각을 했지만 장인이 될 내과의사 김하식의 권유에 따라 외과를 전공했습니다. 장인이 내과 의사였기 때문에 장기려가 외과를 전공하면 함께 병원을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장기려의 스승인 백인제는 장폐색증을 연구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수술법을 개발한 의술이 뛰어난 사람으로 애국심도 뛰어나 3 1 운동에 참가하여 형무소 생활까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백인제는 장기려에게 대전 도립 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제안했으나 장기려는 일본 사람들이 많은 대전 도립병원의 높은 직금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사가 되고 싶다며 이를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1940년 장기려는 30세의 나이로 평양 기홀 병원 외과 과장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국민 의료 보험도 없었고 치료비가 무척 비쌌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제대로 치료 한 번 못받고 죽기 일쑤였습니다.

 

장기려는 형편이 어려워 수술비를 못내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내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주말에는 진료 도구를 챙겨 의사가 없는 외딴 곳에 찾아가서 무료료 환자들을 진찰해주기도 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평양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장기려는 제3 육군 병원에 취직했지만, 당시에 만난 전영창, 한상동과 의기투합해 부산 영도의 제3 교회 창고에 복음 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무료 병원을 차리고 육군 병원을 그만두었습니다.

 

미군은 장기려가 정성을 다해 환자를 치료하자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스승인 백인제도 수술대를 지원하고 전시 연합 대학의 서울대 의대 교수로 부산에 온 전종휘도 장기려를 돕게 되었습니다.

 

 

 

1954년 말 복음 병원에서 장기려를 돕고 있던 말스베리 선교사는 미군 원조 기관에 가서 천주교 계통의 메리놀 병원을 돕고 있으니 복음 병원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교회에서 모은 헌금으로 송도 지역에 1만여 평의 땅을 살 수 있었고 이렇게 세운 복음 병원이 부산에서 가장 규모 있는 의료 기관인 고신대학교 복음병원(고신의료원) 이 되었습니다.

 

1959년 장기려는 부산대학교 의과 대학 외과 교실을 맡고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간암 환자의 간을 잘라내는 수술에 성공했습니다. 1960년에 이 수술 결과가 대한 의학회 학술 대회에 보고 되었고 1961년 대한 의학괴 학술상(대통령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장기려는 30년 넘게 의사로 꽤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느라 집 한 채도 가지지 못했고 아내와 자녀들 또한 넉넉한 형편에서 살아보질 못했습니다.

 

 

 

1962년 장기려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국제 외과 학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제자 의사들은 유럽까지 세계일주를 하고 오라며 여비를 보태주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병원이 있으면 들어가서 한국의 외과 의사라고 소개한 뒤 수술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장기려는 끼니도 제대로 먹지 않고 여비로 받은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내놓기도 했습니다.

 

장기려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나라의 지원을 받는 의료 보험 제도가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1968년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 부산 모임에서 채규철은 장기려에게 덴마크 유학 시절 자신이 경험했던 의료 보험 조합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채규철은 부산 문화원을 찾가아 의료 보험 조합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미국의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본보기로 한 조합 설립을 주장했고, 담배 한 갑 보다 저렴한 기금을 모아 자신이나 가족들이 병원에서 무료로 검사를 받고 치료비의 20% 만 부담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제안했습니다.

 

장기려와 부산 모임 회원들은 여러 교회를 다니며 의료 보험 조합을 만드는데 동참할 것을 요청했고 200여 세대 700여 명의 조합원으로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의료 보험 혜택을 받게 된 것은 1989년부터인데, 장기려는 무려 21년이나 앞선 1968년에 부산에서나마 이를 실시를 했던 것입니다.

 

 

 

장기려는 1979년 필리핀에 가서 막사이사이 사회 봉사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받은 물품마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한 편, 한국 전쟁 당시 둘째 아들 장가용만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온 장기려는 중매도 절대 받지 않고 북쪽에 있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식들을 늘 생각하며 다시 만날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00년에 결국 평양에서 가족과 상봉하게 되었습니다.

 

장기려는 1995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 한 채도, 값나가는 귀한 물건도 없이 지냈습니다. 장기려는 경성 의학 전문학교 입학 시험을 치렀던 18세 때 기도했던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떠났습니다.

 

 

 

사후

 

1995년에는 재미 한국인 의사회 봉사상을 받았고

 

1996년에는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습니다.

 

 

 

부산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1951년 장기려가 전영창, 한상동과 함께 부산 서구 암남동에 설립한 병원입니다.

 

[출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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