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허준 의원 신분의 제약을 뛰어넘은 구암 동의보감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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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허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허준은 1539년 경기도 파주에서 무관이었던 아버지 허논과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둘째이자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허준이 태어난 양천 허씨 가문은 양반가문이었는데, 허준은 첩의 아들이었으므로 서자로서 여러 가지 차별과 사회적 제약들을 헤쳐나가야 했습니다.

 

허준의 아버지 허논은 부안 군수로 있다가 부모의 상을 당해 잠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경기도 파주에 올라온 동안 허준이 태어난 것이었고, 허준은 유년시절 대부분을 전라남도 담양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허준은 글공부를 해도 서자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는 것을 알았기에 의학을 공부하여 내의원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근방의 유명한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의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0여년 간 의술을 공부한 허준은 점차 의원으로서 명성이 알려졌고 허준의 외삼촌과 친분이 두터웠던 유희춘 대감 덕분에 허준의 이름은 한성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유희춘이 허준에게 부탁을 하면 허준은 어느 지방이든 병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정성스럽게 치료를 했습니다. 어느 날 유희춘은 허준을 불러 이조 판서 홍담에게 소개를 해줬고 내의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의원은 궁중에 있는 의료기관으로 왕, 왕비, 왕족과 종친, 대신들의 병을 치료하는 조선 제일의 의료기관이었습니다.

 

허준은 종9품 참봉직을 맡게 되었고 지방에서 약재들을 모아 중앙으로 보내는 일을 맡았습니다. 늘 성심성의껏 일하는 태도가 눈에 띄어 한성에 다시 불려가게 되었고, 35세 되던 1573년에는 내의원 중 가장 높은 정3품 내의원정이 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의원 중 한 명이었던 양예수는 성실하고 능력있는 허준에게 자신의 의술을 전수하고 싶었고 허준 또한 유희춘 대감을 통해 익히 알고 있어 둘은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었습니다.

 

훗날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스승인 양예수가 우리 실정에 맞는 의학설을 담은 의림촬요의 내용을 충분히 반영하였습니다.

 

1575년 37세가 된 허준은 임금을 특별히 진찰하는 시의가 되었습니다.1581년에는 사람의 맥을 다루는 찬도방론맥결집성 의술서를 출간했습니다.

 

1590년 허준은 왕자의 두창을 정성스럽게 치료했고 결국 왕자는 두창을 물리치고 살아났습니다. 이에 임금인 선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준을 당상관으로 진급시켰고 허준은 서자 또한 신분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학질(말라리아)이 유행하여 많은 백성들이 죽음을 면하지 못했고, 선조는 허준에게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의학책을 우리말로 다시 쓰게끔 했습니다.

 

허준은 언해구급방, 언해태산집요, 언해두창집요 등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의학 책을 출간했고, 1596년 선조는 허준을 다시 불러 종합 의학책을 짓도록 명했습니다.

 

 

 

 

1608년 선조의 병세가 악화되었고 가망이 없기에 아무 처치도 하지 않은 허준을 신하들은 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광해군은 허준을 귀양하는 것으로 적절히 무마했습니다.

 

당시에는 선왕이 죽으면 선왕의 진료를 맡았던 어의는 벌을 받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610년 허준은 마침내 25권으로 이루어진 동의보감을 완성했습니다. 동의보감은 중국의 모든 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실정과 환경에 맞는 향약을 접목시킨 의학책이었습니다.

 

1613년 역병은 다시 발병했고 허준을 역병을 가라앉히기 위해 벽역신방, 신찬벽온방 책을 펴내 전국에 배포했고 역병이 수그러들 무렵인 161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광해군은 자신이 두창으로 고생할 때 정성껏 치료해주었던 허준에게 감사하며 정1품에 해당하는 보국숭록대부와 서하군의 벼슬을 내려주었습니다.

 

 

[출처: 동의보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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