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이황 유학자 청렴한 공직자 퇴계 도산서원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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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이황은 1501년 11월 26일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현 온계리(현재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에서 아버지 이식과 어머니 박씨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이식은 이황이 태어난지 일곱달만에 세상을 떠났고 첫째 부인의 자녀들까지 총 6남 1녀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 밑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조상을 욕되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며 학문은 물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작은아버지 이우도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길러주었고 글공부도 가르쳤습니다.

 

이황은 한 번 책을 잡으면 열중했고 늘 복습하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1519년에는 영천(현재 영주)의 의원에서 의술도 공부했는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한 탓에 이황의 몸은 아주 약했습니다.

 

이후, 이황은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고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건강을 지켜나갔습니다.

 

 

 

1523년 23세 때 이황은 한성의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고향에서 시행한 향시에 세번이나 떨어지며 낙심을 했지만 1532년 결국 문과 초시에 합격했고 1534년 마침내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이황은 벼슬에 큰 뜻이 없었고 학문에 힘쓰고 싶어했던 것을 잘 알던 어머니는 세상이 이황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관직 생활 초기에 김안로의 방해로 이미 좌절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황의 능력을 인정한 조정에서 6품까지 벼슬을 올려주게 되었습니다. 이황은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올곧게 걸어나갔습니다.

 

이황은 주로 한성에서 학문과 관련된 기관에 소속되어 일을 했고, 딱 두 번 지방의 군수로 일했던 단양과 풍기에서는 모든 문제를 조용하고 간단하게 잘 다루어 해결했고, 자신이 잘한 일을 결코 뽐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안간힘을 써서 높은 관직에 오르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황은 임금이 관직을 내릴 때마다 사직서를 냈고 형제와 같은 행정구역에 근무하게 되면 어김없이 물러나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1553년 53세 때 성균관 대사성의 자리에 올라 나라의 교육을 책임지게 되었지만 병을 이유로 금세 대사성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황은 고향에 도산 서당을 세우고 교육의 장을 열었습니다.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 각각의 학문과 덕행의 깊고 얕음에 따라 가르침을 주었고 제자들을 친구 대하듯 하며 스승을 자처하지 않았습니다.

 

명종 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 또한 선왕인 명종처럼 어떻게든 이황을 조정으로 불러오려고 애를 썼으나 이황은 번번이 나이가 많고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조정에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학문의 실천에 큰 뜻이 없던 선조에게 이황은 선현들이 지은 글을 모으고 자신의 뜻을 보태어 성학십도를 만들어 선조에게 올렸습니다. 

 

이황의 밑에서 류성룡, 김성일, 기대승과 같은 훌륭한 정치가와 학자가 330여명이나 배출되었고 1570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자들에게 학문 연구에 더욱 힘써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도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토계리)

 

1560년 퇴계 이황이 세운 사학 교육 기관
1969년 5월 31일 사적으로 지정

도산서원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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