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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학자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목민심서 수원화성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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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약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정약용은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양수리 마재(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여러 고을의 군수와 현감을 지낸 청렴한 관리였으나, 붕당 정치로 인해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마재로 내려와 살고 있었습니다.

 

4세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9세 되던 1770년 어머니 윤씨가 세상을 떠나 그 슬픔을 잊으려 더욱 책을 읽는데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10세 때는 삼미집이라는 시집을 펴냈습니다.

 

1776년 15세 되던 해 승지 홍화보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 정재원에게는 호조 좌랑이라는 벼슬이 내려졌습니다.

 

사도 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 사도 세자를 보호하려다가 벼슬에서 물러난 시파와 개혁을 할 인재들을 다시 불러들인 것입니다.

 

 

 

정약용은 누나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매형인 이승훈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승훈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회를 창설한 인물입니다.

 

한성에 온 정약용은 과거 공부를 열심히 했고 공부를 하던 중 아무런 비판없이 무작정 성리학을 따르려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 뿐만 아니라 속담에도 관심이 많아 속담 241개를 모은 이담속찬이라는 책도 펴내고, 우리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며 아방강역고 라는 책도 펴냈습니다.

 

1783년 정약용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습니다. 정약용의 재주를 알고 있던 정조도 1789년 정약용을 초계문신(37세 이하의 젊은 인재들을 선발해 규장각에서 일하도록 하는 제도) 으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정조는 어느 한 붕당에 치우침 없이 인재를 고르게 뽑는 탕평책을 사용하고 있었고 1792년 홍문관으로 자리를 옮긴 정약용을 자주 불러 어떤 일에 대해 정약용의 의견을 물어보곤 했을 정도로 신뢰를 했습니다.

 

 

 

1784년 정약용은 큰형수의 제사를 지내려고 마재로 돌아갔고 매형인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서학을 들여온 사실을 알게되고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통해 임금에게 반역하는 자들을 벌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졌고 결국 정조는 천주교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정조는 개혁 정치를 위해 수도를 옮기려고 수원에 성을 쌓고 사도 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정조는 좌의정 채제공의 조언을 얻어 결국 상복을 벗지 못한 정약용을 급히 불러 수원 화성을 짓도록 명했습니다.

 

1792년 정약용은 수원에 화성을 쌓는 기본 계획서인 수원 성제를 완성했고 1796년 마침내 거대한 화성이 완성되었습니다. 거중기를 만든 덕분에 예정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비용도 절약했던 것입니다.

 

1794년 정약용은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다시 조정에 나왔고 경기도의 암행어사가 되었습니다. 천주교를 금지했지만 천주교도들은 계속 늘어갔고 베이징 천주교당에 있는 프랑스 신부 구베아는 중국 신부 주문모를 조선으로 보냈습니다. 

 

 

 

그 이후에도 벽파 신하들은 천주교 탄압과 정약용을 모함하는 일을 계속 진행했고, 정약용의 바람막이가 되어주던 채제공과 정조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고향 마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순조는 아직 11세 밖에 되지 않아 정순왕후가 나랏일을 대신(수렴청정) 하였고 천주교를 믿던 정약용은 형들과 함께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유배되었습니다.

 

정약용과 형제들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유배를 가게 되었고 1801년부터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약용은 관리의 잘못을 막고 나라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백성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에 대한 연구와 책을 쓰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을 펴냈고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오게 되었고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1883년 여유당전서를 펴내어 규장각에 보관함.

 

1910년 정2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 벼슬과 문도공의 시호를 받음.

 

 

 

목민심서

 

1818년 완성된 목민심서, 48권 16책으로 구성. 

 

[출처: 목민심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원화성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번지

 

사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출처: 수원화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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