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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과학자 세계 최초 우량계 측우기 수표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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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영정 *출처: 나무위키

 

일대기

 

장영실은 1390년경 태어났다고 추청되며, 아버지는 중국에서 피난을 와서 귀화한 장성휘이고, 어머니는 기생 노비 출신이었기에 장영실은 부산 동래현의 관노비로 자랐습니다.

 

동래 관청에서 노비로 일하고 있던 장영실은 손재주가 뛰어나 익히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당시 임금인 태종에게도 그 소식이 들어갔습니다. 마침 태종은 궁궐에서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들을 구하고 있었고 장영실을 한성으로 불러 몇 가지 물품을 만들어보게 했습니다.

 

다행히 임금은 장영실의 솜씨가 마음에 들었고 궁궐에 소속된 노비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궁중에서 천문학을 연구하던 중인 신분의 친구 윤사웅과 최천구, 그리고 장영실은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천문학을 발전시키고 싶었던 세종은 정확한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장영실의 말에 귀기울였고 명나라에 가서 원나라 때 곽수경이라는 학자가 만든 천문 관측기구들과 수시력을 배우도록 지원해주었습니다.

 

천문학의 기본이 바로 정확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장영실은 명나라 유학중에도 물시계를 만들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1422년 명나라에서 돌아온 장영실 일행은 양각혼의성상도감 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천문 관측기구를 만드는 일을 진행했습니다.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 상의원 별좌라는 벼슬을 내렸는데, 이는 선례가 없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1433년, 결국 장영실은 10여 년이 지나 물시계 자격루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세종은 자격루를 설치하기 위헤 경회루 연못 남쪽에 보루각 이라는 누각을 세웠습니다.

 

자격루로 잰 시각은 항성의 표준 시각으로 정해졌고 매 시각마다 도성 곳곳으로 전달되어 백성들의 생활 기준이 되었습니다. 

 

 

 

자격루를 정식 가동한 다음 날인 1434년 7월 2일, 세종은 이천에게 새로운 금속 활자를 만들 것을 명했는데, 장영실에게 이 일을 돕도록 했습니다.

 

금속 활자는 태종 때 주자소 라는 관청에서 이미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직 문제가 있었고 책을 인쇄하고 금속 무기를 만들어 국방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장영실은 이천과 함께 금속 활자인 갑인자를 만들었고 그 이후에는 박연과 함께 악기를 만드는 일도 시작했습니다.

 

세종은 다시 장영실에게 종3품에 해당하는 대호군의 벼슬을 내렸고, 이는 과거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이 오르기에는 정말 힘든 벼슬이었습니다.

 

 

 

1438년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철과 구리광산이 발견되었고 세종은 장영실에게 채방별감이라는 벼슬을 내려 광산 개발과 구리 및 철 생산 업무를 담당하게 했습니다. 천문 관측기구 또한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는 청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1442년 장영실이 새로 만든 세종의 전용 가마가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세종이 가마에 타고 있지 않았을 때 부서졌지만, 신하들은 당시 법률대로 곤장 100대의 죄와 관직에서 물러나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을 감싸주고 싶었지만, 신하들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곤장 80대로 줄여주고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난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후의 행적은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사후

 

세종 때 제작한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가 수명이 다해 시간이 잘 맞지 않자, 
중종 때 박세룡에게 제작을 명하여 새롭게 창경궁 자격루 누기를 만들었습니다. 

 

1985년 8월 9일 국보 제 229호 로 지정되었으며,
국립고궁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12) 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창경궁 자격루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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