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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실학자 서예가 고증 역사 금석학자 추사 세한도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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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정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추사 김정희 영정

 

보물 제457호, 김정희 사후 이한철이 대례복(중대한 의식이 있을 때 벼슬아치가 입던 예복)을 입은 김정희의 초상을 그림.

 

 

 

일대기

 

김정희는 1786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김노경과 유씨 부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명은 원춘이었고 호는 처음에 추사였는데, 이후 100여 개의 호를 바꿔 썼습니다.

 

김정희의 집안은 고조할아버지인 김흥경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번창하기 시작해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해 월성위라는 벼슬을 얻었습니다.

 

할아버지인 김이주 또한 영조의 보살핌으로 우참찬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아버지 김노경 또한 판서를 지냈고 어머니는 군수를 지낸 유군주의 딸이었습니다.

 

이처럼 김정희의 가문인 경주 김씨는 조선 후기 세도 정치의 주도세력이었던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함께 대단한 세력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훗날 김정희가 당파 싸움에 휘말려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 배경이기도 했습니다.

 

 

김정희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 쓰는 것을 좋아했고 하루는 당시 재상이었던 채제공이 김정희가 쓴 대문 간판 글씨를 보고 놀라 길을 멈추고 방문했습니다.

 

김정희가 10살이 되던 해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12살이 되던 해에는 갑자기 큰아버지 김노영과 할아버지 김이주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이어 할머니와 사촌 형이 세상을 떠나고 16세 때에는 어머니인 유씨 부인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정희는 이토록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학문을 배우는 일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김정희는 북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셨고 4년 뒤인 1805년에는 김정희의 부인 한산 이씨와 스승 박제가도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23세 때인 1808년 김정희는 예안 이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했고 김정희는 과거시험 사마시에 합격해 자제 군관(외교관의 업무를 보조하고 타국의 견문을 익히게 하는 제도) 자격으로 로 동지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함께 연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청나라의 유명 서예가이자 학자였던 옹방강을 찾아뵈었고 옹방강 또한 김정희의 글 재주에 반하여 석묵서루의 책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한, 다른 유명 학자였던 완원도 만나게 되어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고 완원은 김정희에게 완당 이라는 호를 내려주었습니다. 완원은 김정희에게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 학문을 가르쳐주었고 이는 훗날 김정희가 이룬 학문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조선으로 돌아와 비석이나 종 등에 적힌 글인 금석문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816년 김정희는 친구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랐다가 신라 진흥왕이 세운 비석을 발견했고, 진흥왕 순수비 발견 덕분에 진흥왕 때 신라의 국토가 서쪽으로 어느정도까지 뻗어있었는지 후세에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38세에 규장각 대교로 출발해 41세 때 충청도 암행어사로 내려간 김정희는 서천군 비인현 현감인 김우명의 잘못을 알고 벼슬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의 집안은 이를 계기로 김정희에게 앙심을 품고 1830년 김정희의 아버지인 김노경을 모함하여 외딴 섬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1835년 겨우 귀양에서 풀려난 아버지는 2년 후인 1837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840년 김정희는 55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수행했던 동지부사에 임명되어 다시 연경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사간이 된 김우명이 김정희를 다시 역적으로 몰았고 연경으로 떠나지 못한 김정희는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편지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학문, 사상, 예술을 이야기 했지만 오랜 귀양살이와 낯선 기후, 환경 등으로 온갖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귀양살이 중에 누나, 사촌 형,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이를 잊기 위해 더더욱 학문에 매진했고 가르침을 받으러 전국에서 제주도로 제자들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또한 1844년 자신을 위해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해다 주는 제자 이상적의 정성에 답하기 위해 세한도를 그려주었는데 이는 김정희 예술의 최고 명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1848년 8년만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김정희는 서울 노량진 강가에서 기울어진 집안을 다시 잡으려 노렸했으나 1851년 안동 김씨의 일가인 순원 왕후가 세력을 잡게 되고 안동 김씨를 반대하던 사람들을 온갖 명목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김정희 또한 억울하게 다시 북청으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고 1852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며 다행히 석방이 되었습니다.

이후 과천과 서울 봉은사 등에서 머무르던 김정희는 무수히 많은 글씨를 썼고 판전 이라는 두 글자를 남기고 185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출처: 김정희 세한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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