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기
정조는 1752년 9월 22일 사도 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정조의 본명은 산이며, 자는 형운, 호는 홍재입니다.
정조는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총명했으며 특히 할아버지인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또한 정조는 백성들을 먼저 아끼고 위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학문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습니다.
1749년 영조는 체력이 약해져 사도 세자가 대리 청정을 시작했고 1752년 조정의 일을 잘못 처리했다는 이유로 영조에게 심한 꾸중을 듣게 되었고 이후 화병이 나게 됩니다.
이후 마음대로 행동하며 난폭한 모습을 보였고, 1761년에는 석달 동안 평안도를 여행한 것이 빌미가 되었고
1762년 정조자 11세 되던 해, 아버지 사도 세자가 붕당을 맺었다는 누명을 쓰고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되었습니다. (임오화변)
당시에는 영조를 지지하는 부왕파와 사도 세자를 지지하는 세자파로 나뉘어 있었고, 영조의 탕평책 시행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이를 이간질 하는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776년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과거 자신이 한순간 잘못 판단하여 아들인 사도 세자를 죽게 만들고 그 슬픔을 느꼈을 정조에게도 미안함을 남겼습니다.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 22대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 받아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붕당을 모두 없앨 계획으로 규장각을 만들었습니다.
규장각은 본래 사도 세자를 죽이고 정조를 모함하던 자들을 숙청하기 위한 기구였고 훗날 왕실 도서관으로 기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또한 왕권의 안정을 위해 친위 세력을 키우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장용영이라는 군단도 조직했습니다.
정조는 1777년 서자들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서류허통절목을 정하여 반포했고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서자 출신 실학자로 유명한 사람들에게 규장각의 일을 맡겼습니다.
선조 때 전라도 전주 출신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여 많은 전라도 선비들이 죽임을 당했던 기축옥사 이후, 처음으로 정조가 전라도 지방의 사람들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차별없는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더불어 정조는 영조의 문화 정책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 시대를 열었습니다.
성리학, 한문학 뿐만 아니라 소설, 시, 실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간행되었습니다.
정조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헌 세자라 높여 부르고 묘를 영우원이라 정했습니다.
1789년 영조의 사위였던 박명원은 정조의 뜻을 헤아려 사도 세자의 무덤을 옮겨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결국 수원으로 옮기기로 정했습니다.
한강을 건너가기 위해 경강 상인들의 배를 이용하여 다리를 만들었고 이 때 배다리를 설계했던 사람이 정약용입니다.
정조는 새로 옮긴 사도 세자의 묘를 현륭원이라 지었고 현재 수원에 있는 융릉이 되었습니다.
또한, 현륭원과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절을 짓도록 했고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용주사라 이름지었습니다.
1796년에는 당시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를 용주사에 머물게 하여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목판에 새기도록 하였고 이 목판은 현재도 용주사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읍에 왕실의 무덤이 들어서면 읍을 옮기는 것이 조선시대 관례였으나 정조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수원을 남달리 생각했고 대도시로 키워 나갈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방어시설이 없던 수원에 유사시에 적을 협공할 수 있는 성곽을 세울 계획을 했고 채제공의 축성방략을 근거로 수원 화성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정조의 뜻에 따라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수원 화성을 만든 과정과 제도, 의식 등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가 편찬되었고 1801년 순조 때 발간되었습니다.
정조의 의지, 책임자인 채제공의 효율적인 관리, 서양 기술을 들여온 정약용의 노력으로 10년을 계획했던 수원화성은 2년 8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훗날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살갗을 파고드는 부스럼 병을 앓고 있던 정조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과로를 한 탓에 크게 병이 났고 1800년
결국 49세의 나이로 창경궁 영춘헌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후
정조의 생전 뜻에 따라 신하들은 사도 세자의 무덤 근처의 언덕에 묻었고(건릉)
정조에게 문성무열성인장효 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1821년 순조가 건릉을 현륭원 서쪽의 현 위치로 이장했고,
1899년 고종이 정조 선황제로 추존했습니다.
홍재전서
1799년 정조가 손수 지어 규장각에서 간행한 책.
100권이 넘는 거대한 전집으로 정조의 모든 관심사가 드러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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