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기
주시경은 1876년 12월 22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전산리 무릉골에서 아버지 주학원과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주시경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풍기에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13대 손입니다.
해마다 과거를 보러 다니느라 집안 살림에 소홀했던 아버지 주학원으로 인해 주시경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고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았습니다.
주시경은 어려서부터 호기심과 탐구욕이 강했고 마음 먹은 일은 끝을 보는 성격이었습니다.
주시경은 1882년 7세 때부터 한문 공부를 시작했고 1887년 12세 때 큰아버지 주학만의 자녀들이 세상을 떠나자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한성으로 와서도 글공부를 이어 나갔습니다.
주시경은 이회종 진사의 서당에 들어가게 되고 한문 공부를 하는 틈틈이 우리글에 관심을 가졌고 개인적으로 우리글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주시경은 오랜 고민 끝에 한학을 버리고 서양 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했고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잘사는 나라들은 모두 자신들만의 글자와 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화도조약을 비롯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주변 나라들의 세력 다툼이 갈수록 심해지고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주시경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자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우리말을 연구해야겠다는 신념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1894년 주시경은 배재학당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서양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상투 또한 잘랐습니다.
배재학당 학생들 중 주시경을 눈여겨봤던 독립협회의 서재필은 주시경에게 독립신문의 회계 및 편집 책임을 맡기게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로 쓴 신문이 창간되었습니다.
1900년 주시경은 상동 사립 학교에 국어 문법과를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공부를 이어 나갔고 배재 학당 보통과를 졸업하면서 교장인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주시경은 처음 서양 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1893년부터 1900년까지 배재학당, 이운학교, 흥화학교 등에서 수학, 지리, 역사, 한문은 물론 측량 및 항해술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배웠습니다.
이 무렵 주시경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의술 중 우두법을 들여온 의사 지석영과 만나게 되었고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한 두 사람은 1907년 국문연구소를 설립하고 국문 연구안도 펴냈지만 나라의 형편이 어려웠기에 보고로만 그쳤고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1908년 주시경은 대한 협회 교육부원으로 선발되었고 강습소 졸업생들과 동지들을 봉원사에 모아 국문 연구회를 만들었습니다. 국문 연구회는 훗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술단체인 한글 학회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또한, 1910년 주시경은 국어 문법을 편찬했습니다. 주시경은 이후에도 우리말과 글을 꾸준히 연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우리 글이 얼마나 훌륭한지 널리 알리는 운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잠자는 시간마저 아까워하며 연구를 했던 주시경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고 1914년 7월 27일 결국 과로에 따른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1960년 10월 1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로 이장하고 묘비를 세웠고
1981년 12월 12일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국가 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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