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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 우리 민족 최고의 정복왕 고구려 광개토 대왕릉비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1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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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 *출처: 전통문화포털

 

일대기

 

광개토 대왕은 374년(소수림왕 4년)에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담덕이며 큰아버지가 바로 소수림왕 입니다.

 

당시 고구려의 귀족들은 믿는 종교가 서로 달랐기에 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나라의 종교를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소수림왕은 아들이 없었기에 조카인 담덕을 매우 아꼈고 담덕의 무예와 총명함에 흡족해했습니다. 

 

384년 소수림왕은 세상을 떠났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동생이자 담덕의 아버지인 이련(고국양왕)이 왕이 되었습니다.

 

386년 담덕은 13세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고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다니며 전투 경험을 쌓아갔습니다.

 

 

 

하지만 391년 아버지인 고국양왕마저 세상을 떠났고, 18세의 나이로 담덕은 왕이 되었습니다. 

 

광개토 대왕이 된 담덕은 우선 졸본에 있는 동명왕(주몽)의 무덤에 가서 자손으로 왕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을 치렀고

 

백성들을 헤아리고 마음을 얻는 것의 중요함을 표출했습니다.

 

이어서 연호가 없었던 고구려의 연호를 영락이라고 지었고 당시에는 광개토 대왕을 영락 왕리가 불렀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사냥 대회를 열거나 여러 교육기관에서 키운 유능한 인재들을 모두 등용하였고 어느덧 다른 나라에서 두려워하는 강력한 고구려 군대가 되었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틈만 나면 고구려를 침범해 사람들을 잡아가 노예로 부리던 비려(거란족이 북쪽에 세운 나라)와 숙신(말갈로 불리던 동북 종족)에 군대를 보내어 정벌을 했습니다.

 

또한, 선조의 나라였지만 틈만 나면 고구려에 쳐들어오던 부여와의 전쟁도 큰 승리로 마무리 지었고, 많은 부여 사람들이 고구려오 옮겨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할아버지인 고국원왕 때 전연의 모용한이 고구려를 침략했던 사건과 함께,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체와 어머니를 데리고 가서 항복할 때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던 치욕스러운 사건을 수복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였습니다.

 

407년 마침내 랴오둥 지역을 확실하게 고구려 세력 안에 두게 되었고 고국원왕의 치욕을 씻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남쪽에 있던 백제 또한 틈만 나면 고구려를 침략하려 했고 할아버지인 고국원왕 또한 백제와의 전투 중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당시 백제는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내륙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던 고구려는 비교적 수군의 힘이 약했기에 광개토 대왕은 수군 또한 꾸준히 훈련시켰습니다. 수군이 꼭 필요한 때가 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개토 대왕은 정예부대와 함께 한강을 건너 왕성에 이르렀고 아신왕은 결국 침략을 하지 않겠다며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아신왕은 섬나라인 왜와 계속 몰래 연락하며 고구려에 다시 쳐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399년 마침 신라에서 온 사신이 광개토 대왕에게 왜군을 물리쳐달라고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 제도를 신라에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고구려와 신라는 우호적인 관계였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이끌고 남하했을 때 왜군과 백제군들은 정신없이 도망갔고 신라 내물왕은 이에 감사를 표하게 되었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평소 남쪽의 땅 특히 한강 유역의 기름진 땅에서 거두는 생산물이 고구려의 발전에 큰 바탕에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신라를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413년 광개토 대왕은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인 장수왕 또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쪽으로 나아가려 했습니다. 장수왕 또한 아버지인 광개토 대왕의 뜻을 이어 받아 힘있는 고구려를 이어나갔습니다.

 

참고로, 광개토 대왕의 시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이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영토를 크게 넓혀 두루 평안하게 만든 위대한 왕이라는 뜻입니다.

 

 

 

광개토 대왕릉비

 

414년(장수왕 3년)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광개토 대왕릉비를 세웠습니다.

 

1883년 중국 지안 일대에서 첩자로 활동하던 일본군 참모 본부 중위 사카와 가게노부가 비석의 탁본을 참모 본부에 전달했습니다.

 

1889년 6월 일본 아시아 협회에서 회여록이라는 책을 펴냈고, 고구려 고비 역문이라는 글로 광개토 대왕릉비문의 내용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높이는 6m 39cm, 무게는 37t 입니다. 네 면에 1,775자나 되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중 150여 자는 마모되어 알아볼 수 가 없습니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이 나라를 세운 이야기와 왕실의 계통, 광개토 대왕이 영토를 넓힌 연대별 업적, 그리고 광개토 대왕릉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릉비 동면 북면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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