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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화가 우리나라의 다양한 모습을 그린 겸손한 대화가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14.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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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출처: 나무위키

 

 

일대기

 

김홍도는 1745년 경기도 안산에서 아버지 김석무와 어머니 문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각각 별제, 만호라는 낮은 벼슬을 지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아무런 벼슬도 하지 못해 가난한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김홍도는 중인 신분이었기에 신분의 제약이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겸손한 성품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잘 받아들여 훌륭한 화가가 되는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홍도는 그림, 글, 시 짓기에 모두 뛰어나 삼절로 불리던 스승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1773년 29세 때 김홍도의 그림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이어지자 영조와 정조의 초상화(한국전쟁 당시 불타 없어짐)를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동참 화사 라는 직책도 맡게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조선후기 풍속화의 대가라 불리는 신윤복은 그의 아버지인 신한평이 김홍도의 동료였고 어깨넘어 김홍도의 그림을 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김홍도는 우리 조상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 국토의 아름다움을 그린 진경 산수화, 그리고 동식물의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또한, 임금의 명령을 받아 궁궐에서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정조가 김홍도의 그림을 아꼈기 때문에 손수 지은 시문집인 홍재전서에도 김홍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1783년 김홍도는 39세의 나이로 안기 찰방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화원(화가)이 벼슬에 오르는 것이 아주 힘들던 시절이었지만 김홍도는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고 나라를 위해 그림 그리는 일을 열심히 했기에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789년 정조는 한성에 있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을 화성군으로 옮겼고 현륭원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다음 해인 1790년에는 현륭원의 원찰(죽은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절)로 용주사를 지었고 김홍도에게 절 내부에 불화를 그리는 일을 감독시켰습니다.

 

정조는 부모의 은혜가 아주 크고 소중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부모은중경을 기록하면서 그 안에 김홍도의 그림 14점도 실리게 되었습니다.

 

 

 

1791년 47세가 된 김홍도는 다시 한 번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고 연풍(괴산군)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1796년에는 수원 화성이 완공됨에 따라 여러 화가들과 함께 화성의 봄과 가을 경치를 그린 화성능행도(임금의 무덤에 행차하는 모습)를 완성했습니다.

 

1800년 정조의 죽음 이후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민란이 일어나는 한편, 국가에서는 천주교를 박해하며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김홍도의 활약도 뜸해졌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정확하게 언제 사망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후

 

1818년 아들 김양기가 김홍도의 글과 그림을 모아 단원유묵첩을 만들었습니다.

 

[출처:김홍도필 풍속도화첩 중 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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