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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종교지도자 동학농민운동(혁명) 녹두장군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1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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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출처: 위키백과

 

일대기

 

전봉준은 1855년 전라북도 고창군 당촌 마을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명은 명숙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관리들의 횡포와 각종 질병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여러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을 당장 먹을 식량마저 없었고 참다 못한 농민들은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 관청과 못된 관리들을 공격했습니다. 1876년부터 1894년까지 전국에서 민란이 100여 건이나 일어났습니다.

 

한편 1860년 최제우가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여러 신앙을 종합하여 동학이라는 종교를 만들었고 평등 사상을 강조했고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금세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전봉준은 1890년 동학에 들어갔고, 당시 동학에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지도자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려는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1892년 10월 공주에서, 11월에는 삼례에서 큰 집회를 가졌고 1893년 2월에는 동학 교도들이 한성으로 올라와 궁궐 앞에서 임금에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동학교도들의 결집력이 강해지자 조정에서는 놀라며 어윤중을 보내 동학 교도들을 타일러 해산하게 했습니다.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아주 못된 관리로 이름이 높았는데 물을 담아 놓는 저수지인 보를 만들고 이용하는 농민들에게 강제로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참다못한 농민들은 군수에게 민소를 올리기로 하였는데, 글을 알지 못해 요구사항을 조리있게 작성해줄 전봉준에게 부탁했습니다.

 

1893년 11월과 12월, 전봉준이 써준 글을 갖고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찾아갔으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894년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들은 힘을 합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부 관아로 쳐들어갔지만 조병갑은 소식을 듣고 도망간 뒤였습니다.

 

 

 

조정에서는 고부에서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용태를 보냈는데, 이용태는 고부 관아를 습격한 농민들을 마구잡이로 처벌하고 동학 교도들의 집을 불태우고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전봉준은 잘 훈련받은 이용태의 정식 군대와 맞서기 위해 동학의 조직과 힘을 합치기로 했고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3월 23일 고부 관아를 쉽게 빼앗을 수 있었고 양식이 풍부한 백산(심미산)으로 모였는데 이 때 모인 농민군의 수가 6천 명이 넘었습니다. 

 

전봉준은 군대를 일으킨 뜻을 알리고 규율을 만들어 질서 있게 지휘했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네 가지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파괴하지 않을 것

둘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

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왕의 정치를 깨끗이 할 것

넷째, 군대를 이끌고 한성으로 들어가 썩은 권력자들을 모두 없앨 것

 

 

 

백산에서 출발한 농민군은 부안, 태인을 지나 황토현 고개에서 관군과 맞닿뜨렸습니다. 농민군을 얕잡아 본 관군은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있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농민군은 관군들을 몰아내고 무기다운 무기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4월 21일 장성 황룡촌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또 한 번 관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때 장태(닭장을 응용한 대나무 통)를 사용해 승리하여 장태 싸움이라고도 불립니다.

 

이후 농민군은 전라도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던 전주성마저 함락시켰습니다. 조정에서는 회의를 통해 결국 외세의 힘을 빌리기로 했고 1894년 5월 청나라 군대가 충청도 아산만에 들어왔습니다. 이 때를 노린 일본 군대 또한 인천으로 들어왔습니다.

 

1894년 5월 3일 전주성 전투에서 외세의 병력에 밀려났고, 전봉준은 농민군이 고립되어 양식도 떨어져가고 임금에게 반역할 수는 없기에 전쟁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5월 7일 농민군의 뜻을 받아들인 관군은 서로 싸우지 않기로 약속했고 5월 8일 전주성을 빠져나온 전봉준은 27개 항목의개혁안 안건을 임금에게 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왕실을 욕보이자 1894년 9월 전봉준은 삼례에서 다시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이번에는 못된 관리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외세를 내쫓기 위함이었습니다.

 

10월 16일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의 북접이 만나 힘을 합쳤고 10월 23일 공주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와 전투를 했습니다.

 

전봉준은 관군과 관리들에게 호소하며 힘을 합쳐 외세를 내몰자고 하였으나 관군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이후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의 숫자는 점점 줄어만 갔습니다.

 

조정에서는 전봉준의 목에 상금을 걸었고 쫓기는 신세가 된 전봉준은 동학 동지 김개남을 찾아가기 위해 태인으로 가는 길에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를 들렀습니다.

 

과거 부하였던 김경천이 전봉준을 겉으로는 대접하는 척하였고 실제로는 상금에 눈이 멀어 전봉준을 잡아 관군에 넘겼습니다.

 

한성으로 끌려온 전봉준은 일본 공사관에서 신문을 받았고 온갖 고문에도 일본군을 꾸짖으며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서고 끝까지 백성을 걱정했습니다. 1895년 3월 30일 결국 동학농민군 지도자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사후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대회가 전라북도 전주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정읍 전봉준 유적

 

1878년에 건립되었으며 1974년 해체 수리 작업을 하였고 1981년 11월 2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출처: 정읍 전봉준 유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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