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기
최무선은 1328년경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에서 곡식을 관리하는 광흥창 관리였던 아버지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최무선은 글을 익히는 것보다는 전쟁놀이를 좋아했고 대장을 맡아가며 전략을 세웠고, 손재주를 활용해 다양한 무기들도 만들었습니다.
당시 고려 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이 들어오긴 했지만 중요한 군사 정보였기에 만드는 방법은 알 수 없었습니다.
원나라에 간섭을 받거나 홍건적의 침략을 받는 모습을 보며 최무선은 나라의 군사력을 키워야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청년이 된 최무선은 무기를 만들고 보관하는 군기감에서 관리로 일하게 되었고, 우리의 힘으로 화약을 만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염초와 관련된 의학서까지 섭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0여 년동안 염초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으나 실패했고, 최무선은 고려를 업신여기는 중국에 대한 자존심을 버려가며 중국말을 공부하고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에 나가서 상인들을 극진히 대접하며 화약 만드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최무선은 중국에서 온 이원을 대접하게 되었고 이원은 최무선의 집에서 유황 냄새가 유독 많이 나는 것을 궁금해 했습니다. 마침 이원은 염초 만드는 일을 했던 사람이었고 원나라와 명나라가 싸우는 상황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염초 만드는 일을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왜구들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고려의 모습을 보았던 이원은 결국 최무선에게 염초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1372년 화약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된 최무선은 공민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공민왕은 명나라에 염초와 유황 보급을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명나라 조정에서도 고려가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 화약을 쓰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명나라에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좋겠다 판단하고 화약을 보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374년, 공민왕이 왕위에서 밀려나고 우왕이 즉위했고 최무선의 끈질긴 설득으로 1377년 결국 화통도감이 설치되었습니다. 최무선은 화약을 담을 수 있는 무기부터 배에 장착할 수 있는 커다란 화포까지 만들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최무선의 활약으로 1380년에 전라도 진포(현재 군산) 에 쳐들어온 왜구들의 배를 화포로 침몰시켰고, 1389년 다시 쳐들어온 왜구의 배 300여 척 또한 바다 속으로 가라앉혔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따르는 무리와 최영을 따르는 무리로 나뉘어 있었고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한 이성계가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 그리고 최영마저 모두 죽이고 공양왕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더불어 최무선이 우두머리로 있었던 화통도감도 폐지하고 최무선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매사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최무선은 50세가 넘어 낳은 아들 최해산이 크면 가르쳐주기 위해 화약수련법을 남겼고, 1395년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1403년 아들 최해산이 화차를 발명했고
1420년 각 지방에서 염초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432년 최해산이 세종의 배려로 화약 기술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시작했고
1448년 화포 주조법과 화약 사용법을 다룬 총통등록이 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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