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기
원효는 617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불등을촌의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이름은 설서당 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잉피공은 서당이 김유신 장군처럼 훌륭한 화랑이 되길 원했고 서당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어느날 신라 사람들이 백제군에게 끌려가고 신라군이 고구려군을 죽이는 모습을 보며 왜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맴돌았습니다.
서당은 화랑이 되는 것보다 불교를 공부하여 구도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서당의 굳은 결심에 결국 승낙을 하였고, 근원을 이루는 새벽이라는 뜻의 원효로 스스로 호를 지었습니다.
원효는 항사사의 혜공에게 불법을 배웠고 불경 뿐만 아니라 고된 수행 끝에 진리를 깨우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혜공은 대안 스님을 찾아가 새로운 것을 배우라고 권하였고 대안 스님과 지내던 중 잠시 속세에 내려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보고 오라는 대안 스님의 말을 따라 서라벌로 향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귀족은 귀족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고통을 받는 것을 깨달았고, 당시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 때문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멸시를 받는 사실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원효는 속세의 신분 제도는 부질없고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들도 부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기위해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부처님의 말씀을 쉽게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661년 의상 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당주(현재 경기도 남양만)로 가던 중 무덤에서 밤새 달게 마신 물이 해골물임을 깨닫고 마음이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원효는 그 자리에서 당나라행 계획을 접고 서라벌 분황사로 돌아가 불법을 닦으며 화엄경을 알기 쉽게 풀어낸 화엄경소, 대승기신론소 등 불경 해설서를 지었습니다.
그러던 중 분황사에 온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를 만나게 되었고 요석 공주는 원효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원효는 스님이기에 그 마음을 거절하였고 요석공주는 병이 들었습니다.
결국 무열왕의 도움으로 원효와 요석공주는 연을 맺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설총이었습니다.
설총은 훗날 국학에서 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신문왕의 신임을 받으며 화왕계를 지어 후대에 남기게 됩니다.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거지도 만나고 농부도 만나는 등 신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전했고 다른 스님들은 계율을 어겼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원효는 자신이 행동이 옳다고 믿었기에 아랑곳 하지 않았으며 화엄경 중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살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구절을 노래로 무애가를 만들어 마을마다 다니면서 춤을 추며 불렀습니다.
황룡사에서 임금과 여러 스님을 모시고 법회를 열기까지 했던 원효를 보며 백성들은 점차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삼국간의 전쟁도 끝나고 백성들은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원효는 혈사(굴 속에 있는 절)에서 지내다가 686년 7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686년 아들 설총이 원효상을 분황사에 세웠고
779년 손자 설중업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고산사의 고승인 묘예로부터 원효 대신 환대를 받았습니다.
785년 원효 열반 100주기를 맞이해 서당화상탑비가 세워졌고
1101년 고려 숙종 때 대각 국사 의천의 건의로 원효에게 화쟁 국사 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1967년 서울 효창 공원에 원효 동상이 세워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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