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기
장보고는 787~789년 정도에 전라남도 완도(옛 지명 청해)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청하고 있습니다.
장보고의 어릴 적 이름은 궁복(활보, 활을 잘 쏘는 사람) 이었고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정년과 형과 아우로 친하게 지내며 무예를 익혔습니다.
당시 신라 사회에는 골품 제도가 있어 진골과 6두품, 5두품, 그리고 4두품까지만 벼슬을 할 수 있었고 그 사이에도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 장사를 하고 돌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고 꿈을 펼칠 수 있는 당나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당나라에 도착한 장보고와 정년은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중국 말을 익혔습니다.
당시에 산둥 반도 일대에서 평로치청이라는 절도사가 중앙 정부와 춛올했고 당나라 조정은 그들을 뿌리뽑기 위해 쉬저우에 있는 무녕군이라는 군대를 선봉으로 공격하게 했습니다.
장보고는 궁복이라는 이름 대신 장보고 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정년과 함께 무녕군에 들어가 군인이 되었습니다.
전투에서 큰 활약한 둘은 1천 명 정도의 부대를 거느리는 소장이라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819년에는 무녕군의 활약에 힘입어 평로치청이 토벌되었고 821년 즉위한 목종 황제는 군대를 줄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장보고와 정년 또한 더 이상 무녕군에 남아 있기 힘들었고 장보고는 신라방과 신라원을 중심으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을 해적들에게서 보호해주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인 청해로 돌아온 장보고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일을 맡김에 따라 그 세력이 점점 커져갔습니다.
장보고의 활약은 집사부 시중인 김우징의 귀에 들어갔고 결국 흥덕왕으로부터 청해진 대사 라는 새로운 관직을 하사받아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서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활동을 돕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836년 흥덕왕이 죽고나서 왕위 계승 문제로 김균정을 지지하는 김우징, 김양의 세력과 김제륭을 지지하는 김명, 이홍 등의 세력이 서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결국 김제륭을 지지하는 세력이 승리를 거두고 김제륭은 제43대 희강왕이 되었습니다.
1년 후 김명은 이홍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희강왕은 궁궐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김명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제 44대 민애왕이 되었는데, 나랏일을 돌보지 않은 바람에 신라 백성들은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당나라에서 헤어졌던 정년이 장보고를 다시 찾아오게 되었고 때마침 청해로 피신을 온 김양과 김우징이 함께 희강왕을 끌어내리길 부탁하며 찾아왔습니다.
군대를 정비하여 서라벌(현재 경주)로 거침없이 진격하였고 민애왕은 청해진군의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김우징은 신무왕으로 즉위했고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고 왕을 대신하여 2천 호를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김우징은 왕위에 오른지 6개월 만에 죽었고, 태자였던 김경응(문성왕)이 즉위했습니다.
문성왕은 장보고에게 진해 장군이라는 벼슬을 내렸고 김우징이 이전에 약속했던 장보고의 딸과 문성왕의 혼인을 이행하려하였으나 김양을 비롯한 귀족들의 반대에 결국 없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일에 노여움을 느낀 장보고는 서라벌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고 민애왕을 끌어내릴 때 함께 공을 세웠던 김양의 부하 염장이 계략을 세워 장보고의 진영에 가서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한 장보고를 암살했습니다.
염장은 조정의 명을 받아 청해진을 다스리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장보고를 잊지 못해 당나라와 일본으로 망명을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폐쇄했고 그 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전라북도 벽골군(현재 김제)으로 옮겼으며, 장보고가 이룩한 국제 무역의 통로와 해상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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