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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마라톤 선수 조국에 월계관을 바친 세계 챔피언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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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출처: 위키백과

 

 

일대기

 

손기정은 1912년 음력 8월 29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아버지 손인석과 어머니 김복녀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신의주는 겨울 기온이 섭씨 영하 20도나 되어 겨울철에 할 수 있는 놀이는 공차기 스케이팅 정도만 할 수 있었으며, 번쩍거리는 스케이트를 신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난한 형편의 손기정은 부러워했습니다.

 

손기정은 집에서 약 2km 떨어진 와카다케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늘 뛰어다녔고 땀냄새가 지독했던 옷을 매일 빨아줄 수 없어 어머니는 달갑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여자 고무신을 신겨서 뛰지 못하게 시도했으나 손기정은 새끼줄로 묶어 피가 나면서도 달리곤 했습니다. 그정도로 달리기를 좋아했던 손기정은 자전거를 자신의 경쟁상대로 삼았고 앞질러야 하는 목표로 삼았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손기정의 달리기를 응원하게 되었고, 손기정은 15세 때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안동-신의주가 치른 친선 달리기 대회에서 어른들을 이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가난했던 집안 형편으로 손기정은 진학 대신 신의주에 있는 동익 상회에 취직했고 일이 익숙해지면서 달리기 연습을 다시 시작했고 가게 주인 내외도 특별히 신경을 써주었습니다.

 

1930년 손기정은 신의주 지역 4개 구역 대항 달리기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게 되었고 안동에 있는 동익 상회에 손기정을 보내 시간적 여유를 갖고 달리기 연습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세의 손기정은 평안북도 내의 여러 달리기 대회에서 우승하여 이름을 날렸고 1931년에는 경성에서 열린 조선 신궁 대회에서 5,000m 2위를 차지했습니다.

 

 

 

1932년 양정 고등 보통학교의 육상 선수 제의를 받아 입학하게 되었고 게이힌 역전 경기에서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양정 고등 보통학교 육상부가 우승을 했습니다.

 

수업료는 면제 받을 수 있었지만, 하숙비, 간식비, 교과서 등은 직접 구매해야 했기에 손기정은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고 그 사정을 들은 김수기 육상부 선생님의 지원으로 훈련에 열중할 수 있었습니다.

 

1935년 4월 27일 손기정은 일본 사람들의 경기 단체인 조선 육상 경기 협회가 주관한 제1회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고 세계 최고 기록으로 우승을 했습니다. 2시간 25분대란 인간 체력의 한계를 벗어난 기록이었지만 일본 육상경기연맹은 공인 코스보다 길기 때문에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회에 앞서 도쿄 메이지 신궁 대회에서도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으나 정식 코스 측량이 안됐다며 이 또한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35년 11월 3일 제8회 메이지 신궁 대회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26분 42초를 기록하며 우승한 손기정은 마침내 세계 최고 기록으로 공인 받게 되었습니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 함께 뛰는 남승룡과 함께 선발되기 위해 일부러 2위에 머무르며 일본인 선수들의 체력을 빼 남승룡이 1위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평소 기록이 좋지 않았던 남승룡을 제외하려고 일본 육상 경기 연맹에서 반대를 하였으나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세단 뛰기 우승자인 오다 미키오의 공정한 판단 덕분에 남승룡과 손기정 모두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고, 독일에 머무르는 동안 손기정 KOREA 를 적으며 외국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가 지워진 것을 발견했고 언론인 이길용을 체포해 서대문 형무소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장기 말소 사건입니다.

 

이길용은 옥고를 치른 이후 언론계를 떠난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했고,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납치된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정부는 1991년 8월 15일 광복 45주년 당시 이길용에게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했습니다.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남승룡이 3위를 했다는 소식은 우리 겨레의 자존심을 되살려준 일이었습니다.

 

1937년 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에 입학했지만 늘 일본 경찰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2학년이 되던 해 스스로 보성 전문학교를 그만두고 더 이상 육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본 메이지 대학으로 건너갔습니다.

 

1940년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손기정은 조선 저축은행(현 제일은행)에 취직하고 육상 선수였던 강복신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심장마비와 아내의 간염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고 10월 27일 서울 운동장(현 동대문 운동장) 에서 자유 해방 경축 전국 종합 경기 대회가 열렸고 손기정은 기수로서 태극기를 들고 4천여 명의 선수들과 함께 입장했습니다.

 

1947년, 195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등 손기정이 열심히 후배 선수들을 지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바로 손기정의 혹독한 훈련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입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 회의가 열렸고 손기정도 유치 사절단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는 주한 서독 대사관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는 청동 투구를 마침내 손기정에게 직접 전달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에 기증했다고 전해집니다.

 

마침내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 날 손기정은 마지막 성화를 들고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1995년 올림픽 창설 100주년 기념 마라톤 대회에 특별 초청을 받았고,

1996년 베를린 올림픽 6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으나

2002년 결국 숙환으로 별세하게 되었습니다.

 

 

 

손기정 체육공원

 

서울 중구 손기정로 101-4

손기정 체육공원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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