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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무용가 민족 무용의 선구자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7. 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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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승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경성에서 아버지 최준현과 어머니 박성녀 사이 4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최승희의 집안은 정승과 판서를 지낸 해주 최씨 명문가였고, 최승희도 소학교인 숙명 학교 보통과를 다니며 공부를 잘해서 1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숙명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집안이 망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 때부터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형편이 좋지 않았으나 최승희의 재능을 아라본 김영환 음악 선생님 덕분에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숙명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할 당시까지만해도 키가 작았던 최승희는 갑자기 키가 자랐고, 얼굴도 예쁘고 자존심도 강한 소녀로 자랐습니다.

 

1926년 경성 사범학교 입학 시험에서 7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입학이 취소되어 상심에 빠진 그 때 세계적인 일본인 무용가 이시이 바쿠 일행이 경성 공연을 위해 조선에 왔습니다.

 

이시이 바쿠는 조선 민족이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는 것을 우연히 보고서는 안타까워하며 조선 사람을 제자로 삼아 교육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시이 바쿠는 모든 예술은 한을 바탕으로 하며 무용 또한 한의 정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은 이시이 바쿠 무용 연구소에서 조선인 연구생을 뽑는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 동생을 데리고 공연을 관람하러 갔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오빠 최승일은 이시이 비쿠에게 동생을 제자로 삼아 달라고 했고 재능을 알아보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1926년 최승희는 도쿄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 무용단 공연에 처음 출연하여 춤을 추게 되었고 슬픔에 잠겨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에게도 큰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최승희는 독립 정신과 예술에 대한 창작열이 강하여 1929년 이시이 바쿠 연구소를 떠나 경성으로 돌아와 무용 연구소를 세우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1930년 10월, 최승희가 세운 무용 연구소의 공연을 선보였고 금혼식 무용, 인도인의 비애, 그라나다, 정토의 무희, 그들의 로맨스 등 창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최승희는 동양 무용에 민족 정신을 불어 넣는데 집중을 하였습니다.

 

1931년 큰오빠 최승일과 유명 문학 비평가였던 박영희의 주선으로 남편 안막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남편 안막에게 자신은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고 안막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사회주의 문학 운동에 관여하고 항일 성격이 강한 글을 발표했던 안막을 일본 형사들이 잡아갔고 안막은 감옥에서 고초를 겪으면서도 최승희가 지방 순회 공연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습니다.

 

최승희의 작품에도 은연중에 일제와의 투쟁, 독립운동을 부추기는 내용을이 표현되기 시작했습니다.

 

1933년 23세의 최승희는 스승인 이시이 바쿠에게 다시 돌아가게 되었고, 안막은 이시이 바쿠의 설득에 따라 문학 활동에서 손을 떼고 최승희가 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여류 무용 대회에서 최초의 조선 무용인 에헤야 노아라 를 선보였고, 칼춤, 왕무, 천하대장군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민속 무용을 전파해 나갔습니다.

 

 

 

이후 1937년 세계 순회 공연을 계획해 1938년 샌프란시스코 카란 극장에서 미국 첫 무대를 가졌고, 1939년에는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등 유럽 각지에서 공연을 하며 코리안 댄서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조국애을 보여주었습니다.

 

1941년 일본에는 강력한 군사 정부가 들어섰고 일제 군부의 각종 간섭으로 공연비 일부를 헌납하고 제약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결국 최승희는 남편 안막과 함께 중국으로 도피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서울로 돌아온 최승희에게는 친일파 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최승희는 일제 시대 때 일본 군대를 위해 위문 공연을 했던 사실에 고통을 느꼈고 결국 가족들과 북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생활비와 연구소를 마련해주었고 1946년 9월 7일 국립 최승희 무용 연구소가 평양에 문을 열었습니다. 안막도 문학 예술 총동맹 부위원장이 되어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순수 예술을 하려는 최승희에게 북한 노동당은 오직 공산주의 예술만을 강요하여 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최승희는 전쟁을 피해 중국으로 가서 총리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베이징 중앙 희극 학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55년에는 폴란드에서 열린 세계 청년 학생 축전에 심사 위원으로 가게 되었고 북한에서는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으로까지 뽑히게 되었습니다.

 

1958년에는 조선 민족 무용 기본이라는 책을 펴냈고 40가지의 전통 춤사위를 체계화했습니다.특히 반야월성곡, 사도성의 이야기는 최승희의 대표적인 무용극으로 손꼽히며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을 결합한 동서양의 융합 시도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950년대 중반 부터는 김일성의 권력이 확고해지고 공산주의 사상이 분명치 않은 지성인들이 대거 숙청되었습니다.

남편 안막은 월북한 다수의 문인들과 함께 1958년 숙청되었고,

 

예술과 정치는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최승희 또한 결국 당의 비판을 받게 되고 1967년 숙청당하고 말았습니다.

 

 

 

기록

 

1967년 최승희가 숙청되었다는 기록이 한국 북한 문제 연구소에서 나왔고,

일본 아사히 신문에도 최승희 등 반 김일성파 추방이라는 기사가 실렸으며,

베네수엘라 시인 아리 라메다의 글에서도 숙청 사실이 확인 되었습니다.

 

이시이 바쿠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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