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기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던 아버지 나형권의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나형권은 신식 군대의 군인이었으나 을사늑약에 따라 군대를 해산시키자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한약방을 열었습니다.
나운규는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연극을 하는 것을 좋아했고 호기심과 흥미를 가진 일이면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습니다.
1918년 나운규는 북간도의 유일한 조선학교이자 독립군 양성소의 역할도 했던 명동 중학교에 다녔고, 1919년 3 1운동에도 참가했습니다.
이후 친구인 윤봉춘과 독립군의 비밀 조직인 청산리 도판부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만난 나이 많은 독립군이 공부를 계속해 지식을 쌓는 것도 애국하는 길이라고 조언을 했고 결국 둘은 1920년 경성 중동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1920년 말 도판부 사건이 알려지면서 나운규와 윤봉춘은 경찰에 체포되어 중동 학교 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청진 감옥에서 만난 애국지사 이춘식은 세계 정세와 여러가지 지식을 알려주었고, 나운규에는 춘사, 윤봉춘에게는 금원이란 호를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나운규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형 나민규도 감옥에 있었고, 작은 형 나시규는 폐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었기에 기울고 있던 집안을 살리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1923년 12월 신파극단 예림회가 회령에 공연을 오게 되었고 나운규는 단장 안종화를 찾아가 간청하여 연구생 배우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난한 살림으로 예림회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나운규는 1924년 부산 영주동에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가 문을 열었고 안종화가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느라 잠시 경성에 올라와있던 안종화를 찾아가 부산으로 갈 때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영화사 시험에서 긴장하여 좋지 못한 연기를 보였던 나운규를 돌려보내려 했으나, 안종화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연구생으로라도 두어 보자고 하여 나운규는 간신히 영화사에 들어갈 수 있었고 운영전 이라는 영화에 가마꾼으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1925년 윤백남 일행을 따라 경성으로 온 나운규는 백남 프로덕션에서 심청의 아버지 심봉사 역을 맡게 되었지만 영화는 흥행을 하지 못했습니다.
1926년 서울 충무로에 사무실을 마련한 조선 키네마 프로덕션에 들어간 나운규는 농중조 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고 흥행도 성공했습니다.
나운규가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은 아리랑 영화의 반응이 아주 좋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영화계에서 인정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친구 윤봉춘도 야서(들쥐) 라는 영화로 영화계에 입문을 했고 죽는 날까지 영화배우, 감독, 제작자 등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검열을 맡은 조선 총독부 검열관이 영화의 내용을 문제 삼았고 부분 부분 잘려나가서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같은 회사의 쓰모리 감독이 윤봉춘에게 심술과 구박을 주며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자 나운규가 함께 싸웠고 사이가 불편해졌습니다. 나운규와 윤봉춘은 일본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하고 자존심이 상했고 할 수만 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 힘으로 영화사를 세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극장 사업으로 성공한 박승필이 이끄는 단성사의 도움을 받아 활동하게 되었고,
1919년 10월 27일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처음 공연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영화의 날의 기원)
1927년 나운규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영화인들과 함께 나운규 프로덕션 이라는 영화사를 세웠고 경성 창신동에 사무실을 마련했습니다.
사나이, 벙어리 삼룡 등 영화가 계속 흥행에 실패하자 1929년 나운규 프로덕션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일본 도쿄로 건너간 나운규는 몇 달 동안 영화도 보고 책도 보며 지내다 다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경성으로 돌아와 원방각이라는 영화사에 들어가게 됬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일본 총독부의 검열과 흥행 실패 등으로 난항을 겪던 나운규는 한양 영화사에서 아리랑 3편을 우리나라 영화로서는 최초로 발성 영화로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운규는 1935년 무렵 기침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폐병에 걸려 몸이 쇠약해져 갔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도 오몽녀라는 평화로운 어촌 마을 배경의 영화를 제작해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 라는 영화는 1937년 나운규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끝내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사후
나운규의 유해는 화장하여 홍제동 화장터에 두었다가 1967년 영화인 협회의 노력으로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1993년 윤봉춘과 함께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아(북간도, 회령 독립운동) 대전 국립 현충원 독립 유공자 묘역으로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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