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기
세종은 1397년 이방원과 민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400년 아버지인 정안대군 이방원이 조선의 제3대 임금이 되었고, 1412년 세종은 충녕대군이 되었습니다.
1418년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밀려나고 충녕대군(세종)이 왕세자가 되었고 그해 8월 태종(이방원)에 이어 조선의 제4대 임금이 되었습니다.
첫째 형인 양녕 대군은 놀기를 좋아하면서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켜 왕세자의 자리를 내놓게 되었고
평소 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시고 형제간의 우애를 잘 지켰던 세종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잠시도 손에서 책을 떼어 놓지 않았으며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신하들이 옳고 그름을 따질 때 의견을 잘 받아주었습니다.
세종의 이런 행동을 보며 신하들은 임금까지도 잘못을 인정하는데 신하인 자신들의 잘못이 언제든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긴장하였습니다.
일례로, 태종에 대항해 세종의 즉위를 반대했던 황희가 유배를 갔었는데,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황희를 불러들여 중요한 일을 맡겼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쪽에서 판단한 세종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세종은 역사, 사상, 과학은 물론 의학에까지 관심이 많았고 단순히 내용을 외우거나 문장을 익히는 것을 떠나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안 탐색을 늘 염두에 두었습니다.
세종은 조선의 학문과 제도, 그리고 문물의 수준이 중국보다 크게 뒤떨어져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따라잡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1421년 금속 활자를 만들면서 인쇄 속도가 빨라지고 활자의 개량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1420년에는 집현전을 확대하고 전국에서 능력있는 학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또한, 집현전의 관리들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 세종이 직접 선발했습니다.
서거정,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등 유명한 학자들이 바로 이 집현전을 통해 배출되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학문 연구는 물론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돕는데까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역사는 물론 유학, 농업, 지리, 법률, 의학 등 다방면으로 연구가 진행되었고, 농사직설, 태종실록, 삼강행실도, 팔도지리지, 향약집성방, 고려사 등 수 많은 유명한 책들이 이 때 출간되었습니다.
신분 구분이 명확했던 조선시대에서 세종은 노비 출신이었던 장영실의 재주를 높게 사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만드는데 열중할 수 있도록 명나라 유학도 보내고 필요한 지원을 아낌없이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 수 많은 물건이 만들어졌고 세종대왕은 장영실에게 높은 벼슬까지 하사했습니다.
일부 신하들은 반대하였지만, 세종은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신분 제도도 무시했던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한자가 아닌, 우리의 글로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활용할 수 있는 한글을 창제하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여 공적인 서류에도 훈민정음을 사용하고 이과 시험에도 훈민정음을 포함시켰습니다.
현재 우리가 이 글을 한글로 읽고 쓸 수 있는 근간이 된 것이었습니다.
1445년에는 집현전 학사와 의관 등이 편찬한 의학 백과 사전 의방유취가 탄생했고 백성들을 위한 의료 시설인 혜민서, 가난하고 의탁할 곳이 없는 이들을 위한 동서 활인서 등 백성들의 건강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세종대왕은 학문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국토를 지키는 데에도 신경을 쏟았습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을 경계로 하는 새로운 조선의 국경이 정해졌고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 또한 토벌했습니다.
또한,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와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의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당시에 옳은 일을 했던 정몽주의 충성심을 높게 사 고려의 역사를 새로 쓰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입니다.
세종은 나이가 들면서 병을 앓게 되자 세자에게 미리 나랏일을 맡기고 자신은 외교 및 군사 문제 등 큰 일에만 개입을 했습니다. 세종은 1450년에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나라의 일을 걱정하고 처리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후
세종의 능은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1469년 예종 때 해당 능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경기도 여주로 옮겨졌습니다.
영릉(사적 제 195호, 세종대왕과 소헌 왕후의 합장능)
1926년 11월 4일 조선어 연구회에서 음력 9월 29일을 훈민정음 반포일로 삼고 가갸날로 이름을 확정했습니다.
1933년 10월 19일 조선어 학회 총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했습니다.
1945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했습니다.
1947년 10월 9일 조선말 큰 사전 제1권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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