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기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도롱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안창호의 부모님은 교육열이 높아 6세 때부터 집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9세 때는 서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의 보살핌으로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한성에서 공부를 마친 안창호는 청일 전쟁을 겪으며 여성들 또한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약혼녀 이혜련과 여동생을 한성으로 데려와 새로운 학문을 배우게 했습니다.
그 사이 안창호는 독립협회 활동을 시작했고 평양 지회를 세우고 쾌재정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며 고종임금이 독립협회에 해산명령을 내렸고, 안창호 또한 독립협회 활동을 중단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에 학교를 세웠고 점진 학교라 이름 지었습니다.
안창호는 어린시절부터 미국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교육자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1902년 결국 약혼녀 이혜련과 함께 미국행을 결정했고 선교사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여러 곳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교육학을 배워 뒤떨어진 우리 민족의 교육을 바로 잡고 초등학교 교육부터 직접 배워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이해하고 싶다는 그의 뜻에 감명 받은 한 초등학교의 교장은 입학을 허가해주었습니다.
하루는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한국인 인삼 행상들을 말리던 안창호가 미국 땅에 있는 한국인들이 백사장의 모래알 같이 흩어져있다는 생각이 들어 동포들을 하나로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한인 교회와 직업소개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안창호는 다시 조국 땅을 밟았고 한성 학교에서의 대중 연설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습니다.
이 계몽 연설을 들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안창호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했고 안창호는 이토 히로부미를 꾸짖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독립에 대한 안창호의 논리가 거침 없고 당당했기에 이토 히로부미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1908년 안창호는 신민회 활동을 하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습니다. 민족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1909년 청년 학우회 라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청년 운동 단체를 만들어 바른 정신을 기르는 수양 단체로 기능하게 했습니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일본 통감부는 조선의 애국지사들을 모두 붙잡아 들였기에 1901년 4년 결국 망명의 길을 택했습니다.
1912년 샌프란시스코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회장이 되었고, 1913년 세운 흥사단을 기반으로 1917년 북미 실업 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또한 1918년에는 멕시코로 건너가 한인 사회를 위해 활동했고, 1919년 3 1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 정부 내무 총장 및 국무총리 대리로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식에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터뜨리는 사건이 발생했고 윤봉길은 김구와 미리 말을 맞춘 대로 이유필의 집에서 일을 준비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침 연락을 받지 못한 안창호는 이유필의 아들에게 소년단 기부금을 내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방문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경찰서와 검사국에서 여러달 동안 고문을 받았지만 의연하고 당당했던 안창호의 모습에 일본인 판사 또한 조선의 위인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치안 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4년을 선고 받았고 형무소 생활을 하던 중 위장병을 앓게 되어 일본은 수형기간이 남은 안창호를 미리 내보내주었습니다.
1937년 산장에서 생활 중이던 안창호는 흥사단의 국내 지부였던 동우회를 독립 운동 단체라고 하며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는 일본 경찰에 다시 붙들려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었습니다.
1937년 12월 24일 병이 더욱 깊어진 안창호는 재판소에서 지정한 경성 제국 대학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1938년 3월 10일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도산(島山)
처음 미국을 갈 때 스스로 지은 호.
인천항을 떠난 지 10여 일이 지나 처음으로 본 육지가 무척 반가웠고
미국에서의 시작될 새로운 희망을 담아 섬의 산이라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도산 공원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공원입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도산 안창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습니다.
안창호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1973년 11월 10일에 도산 공원으로 옮겨와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합장했습니다.
공원에는 안창호의 동상과 어록비 등이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기념관
1998년 11월 9일 안창호 탄생 120주년에 맞춰 개관했습니다.
안창호의 유품과 자료를 전시하고 그의 사상과 정신을 보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매년 3월 10일에는 흥사단과 도산 기념 사업회 주관으로 도산 안창호 추모 행사도 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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