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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사학자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6. 2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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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채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신채호 사학자 및 독립운동가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참고로 신채호는 고령 신씨 집안으로 세종대왕 때 한글을 만드는 데 공이 컸던 신숙주의 18대손입니다.

 

신채호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집안이 기울어 형편이 좋지 않았고 할아버지인 신성우는 정6품 벼슬까지 지냈으나 곧은 성품 때문에 벼슬자리에 있을 때에도 재산을 많이 모아두지 못했습니다.

 

신채호는 형 신재호보다 훨씬 영리했고 가족들의 큰 기대를 받았습니다.

 

신채호가 8살 되던 해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습니다.

 

9살 무렵 이미 중국 역사책인 자치통감을 떼었고 14살이 됐을 때는 사서삼경을 떼고 한시까지 거뜬히 지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18살이 되던해 신채호는 집안의 모든 책을 읽었고, 이후 고종 임금 밑에서 재상을 지낸 개화파 신기선 대감집 서재를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98년 19살의 나이로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추천을 받아 입학하게 되었고 독립 협회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고종 임금은 독립협회의 만민 공동회에서 나오는 국민의 소리를 귀기울여 들었으나 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의회를 만들어 국민의 의견을 직접 정치에 반영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자 고종은 간부들을 잡아들이고 해산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채호는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깨우치기 위한 계몽 운동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문동 학원을 열었고 1905년에는 성균관 박사라는 벼슬을 받게 되었습니다.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국민을 깨우치는 효과를 본 신채호는 한문 보다는 사용하기 쉽고 배우기 쉬운 한글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황성신문의 장지연이 찾아와 집필을 제의했고 신채호의 논설은 조선 안팎으로 빛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신채호는 1905년 11월 일본군이 궁궐을 둘러싸고 을사늑약을 맺자 대한매일신보에 '이날에 또 목놓아 우노라' 라는 논설을 게재하였고 그 외에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글도 썼습니다.

 

신채호는 우리의 것을 기본으로 하여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며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역사 라고 생각하였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직접 역사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독사신론 에서 신채호는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 연구 체계를 정립했고,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 민족 영웅들의 전기도 써내려갔습니다.

 

19010년 한일합병 이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어지자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탈출해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지속적으로 역사연구를 진행했고 민족 독립을 위한 자주정신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가 지은 조선 상고사는 훗날 대종교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1918년 12월 만주의 독립 단체인 중광단이 중심이 되어 독립 운동 지도자 39명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신채호 또한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습니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 정부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주요 독립 인사들이 모였고 이승만이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맡게 되었습니다.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는 이승만와 무장 독립 전쟁론을 주장하는 이동휘의 의견이 달라 난항이 지속되었습니다.

 

신채호는 그런 임시 정부를 비판하다가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왔고 많은 독립군 단체를 하나로 묶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23년 1월 신채호는 우리 독립 운동사에 회자되는 조선 혁명 선언을 발표했고, 1927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힘을 합쳐 만든 신간회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역사 연구에 몰두하던 신채호가 눈이 아주 나빠져 더 이상 역사 연구를 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몸을 혁명에 바치기로 결정했습니다. 

 

 

 

1928년 4월 신채호는 톈진에서 무정부주의 동방 연맹 대회를 이끌었고, 자금 마련을 위해 위조 지폐를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꾸려다가 들통이나 일본 경찰에 체포 및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신채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친구 홍명희 등이 신채호가 연재했던 고대사 논문들을 취합해 조선사 연구초를 편찬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신채호는 자신이 없고 완벽하지 않기에 감옥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나가게 되면 고쳐서 발표하겠다 전했습니다. 

 

학문 앞에서 겸손했던 신채호는 건강이 계속 악화되었고 형무소 측에서도 신채호가 감옥에서 죽게 되면 민족감정이 악화될 것을 우려하던 찰나, 고국의 친척들이 부자 한 사람을 보호자로 내세워 석방 신청을 냈습니다.

 

하지만 그 부자가 친일파였기에 신채호는 친일파에게 몸을 맡기느니 차라리 감옥에서 죽겠다고 하였고 1936년 2월 21일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제는 망명하기 전 호적을 정리했던 신채호의 이름이 호적에 없다는 이유로 사망 선고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묘소 허가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사후

 

1962년 삼일절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88년 단재 동상 건립 위원회에서 서울 대공원에 신채호 동상을 세웠습니다.

 

 

[출처: 조선사연구초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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