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일대기
1545년 4월 28일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마르내골에서 이순신 장군님이 태어났습니다.
이순신의 집안은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 많은 덕수 이씨 가문이었습니다.
특히 증조할아버지 이거는 조선 성종 때 세자였던 연산군의 스승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이백록은 한성 시장의 상인들을 관리하는 평시서라는 하급관리였고 역적 모의에 관련되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어 박해를 당했습니다.
아버지인 이정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마을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고 이순신 가족의 집안 형편을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친정인 충청남도 아산 백암리로 이사를 했으며 이순신은 어렸을 때부터 동네 아이들과 함께 전쟁 놀이를 즐겨 했습니다.
마을에서도 어른일지라도 잘못된 행동을 하면 바른 말을 했던 이순신을 어른들도 만만하게 보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은 어렸을 때부터 두 형인 이희신, 이요신과 글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순신은 모두가 글공부만 하면 나라는 누가 지키지 라는 생각으로
22살이던 1566년 글공부를 그만두고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28살이던 1572년 이순신은 처으으로 과거시험을 치렀고 말을 타는 도중 낙마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주변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부러진 다리를 싸맸던 일화가 있습니다.
32살이던 1576년 무과시험에 드디어 합격하였고 함경도 삼수에 여진족을 막기 위해 세워놓은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580년 36세 때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흥향 발포의 수군만호로 가게 되었고 빠른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1583년 39세 때는 함경도 북청의 남병영을 주재하는 남병사 이용의 밑에서 일하는 군관이 되었습니다.
여진족을 물리친 이순신이었지만, 북병영을 다스리는 김응서가 이를 못 마땅히 여겨 공을 빼앗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시기하는 사람들의 모함에 빠졌었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님의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1591년 47세 때 전라 좌수사가 되었고, 다음 해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을 비롯해
한산도 대첩, 안골포 해전, 부산포 해전, 웅포 해전, 당항포 해전 등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1598년 11월 18일 왜군 장수 요시히로는 사천에서 고니시를 구하러 500여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노량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수군 진영에서 신기전이 불을 밝히며 좌우에서 대포를 쏘아 왜군들은 관음포로 도망쳤습니다.
관음포는 밖에서 보면 넓은 바다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바다가 막혀 더 이상 들어갈 길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왜군의 배는 200여척이나 가라앉았으나 어디서인지 적의 탄환이 날아와 이순신 장군의 왼쪽 가슴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이순인 장군은 싸움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는 말을 하였고 끝내 순국하셨습니다.
사적 제232호인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 이락사는 이순신 장군님의 유해가 제일 먼저 육지에 안치된 곳입니다.
장례는 이순신의 고향인 아산에서 치러졌고 선조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해 낸 이순신의 공을 기리기 위해 그의 벼슬을 좌의정으로 높였습니다.
그 후 광해군 때에는 다시 영의정으로 벼슬이 올라갔고 45년이 지난 1643년에는 인조가 충무공 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거북선
거북선은 우리 역사의 자랑이고 세계에서도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전함입니다.
놀랍게도 거북선은 조선 제 3대 임금인 태종 때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설계도로 전해오는 거북선을 더욱 크고 튼튼하게 발전시킨 인물이 이순신 이었고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거북선을 만들 때 실제 책임자는 나대용 이었습니다. 나대용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창선이라는 새 전투함을 만들고
해추라는 쾌속선도 만들었습니다.
철갑선에 관해서는 1883년 영국 해군 기록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철갑선은 조선 사람이 처음 발명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이충무공 동상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에 있으며, 1968년 4월 27일에 세워졌습니다. 높이는 약 7m 입니다.
충무공 묘
충무공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거리 어라산에 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자 묘소를 마지막 진지였던 고금도에 마련했고
1599년 2월 11일 아산시 음봉면 금성산 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후 16년 뒤인 1614년에 어라산으로 묘소를 옮겼습니다.
충무공 묘소는 1959년 5월 22일 사적 제 11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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