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안중근 의사 동포에게 고함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6. 2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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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참고

의사 = 독립을 위해 무력투쟁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분들
열사 = 독립을 위해 평화투쟁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분들

 

 

일대기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안중근의 집안은 황해도 일대에서 유명한 명문 집안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안인수는 진해 현감을 지냈고, 아버지 안태훈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북두칠성이 안중근을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명을 응칠이라고 지었습니다. 

 

응칠이는 성질이 급해 할아버지는 무거울 중에 뿌리 근 자로, 안중근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문, 유학, 경전, 역사는 물론 총 쏘는 법도 익혔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격실력이 뛰어나 유명한 사냥꾼 못지 않은 실력으로 야생동물을 잡았습니다.

 

 

 

안중근은 1894년 16세의 나이로 김아려 라는 분과 결혼했고 그 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동학농민군 중 행패를 부리는 무리들이 있어 아버지 안태훈이 청계동을 중심으로 사병을 조직했고 

 

농민군 대장 원용일의 부대를 물리쳐내고 식량과 군수물자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내각이 무너지면서 수구파의 민영준이 권력을 잡았고, 

 

안태훈에게 군량미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였고 아버지 안태훈은 안악군 문산면에 있는 천주 교회로 피신했습니다.

 

1897년 1월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이 몸을 숨기고 있던 천구 교회의 프랑스 신부 빌렘(한국 이름: 홍석구)에게 영세를 받았습니다.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나라가 기울어 갈수록 교육이 중요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해 일본에게 권리를 빼앗기자 안중근은 가족들과 함께 상하이로 이주해 국권 회복운동을 계획했습니다. 

 

르각 신부는 안중근에게 뜻있는 사람이 모두 밖으로 나오면 조선은 텅 빈 껍데기가 될 것이라 조언했고

 

안중근 또한 깨달음을 얻고 교육 사업과 사회 단체를 조직하는 일에 힘써야겠다 생각하며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를 했습니다.

 

 

 

1906년 서우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1907년 국채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평안도 국채보상회의 중심인물로도 활동했습니다.

 

1908년 노보키에프스크 지방에서 이범윤, 엄인섭 등과 대한의군을 양성했고

 

1909년 러시아 카리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독립을 위한 단지혈맹을 했습니다.

 

동의단지회를 조직하고 그 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습니다.

 

안중근은 우리 민족을 괴롭힌 것은 물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히던 사람을 심판한 떳떳한 행동이라며 총을 쏜 뒤에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1910년 관동 도독부 고등법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및 거사의 정당성을 당당히 진술했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안중근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기에 항소도 하지 않았고, 옥중에서 안응칠 역사를 탈고하고 동양 평화론을 집필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히 집행되었고, 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라는 글을 남기고 결국 순국했습니다.

 

 

사후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의 죄수 묘지에 묻혔으나 아직까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57년에는 전라남도 장흥군에 안중근의 영정을 모시는 만수사를 건립했고

 

1970년에는 서울 남산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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