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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3·1 운동을 이끈 애국의 횃불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6. 2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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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관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열사 :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일대기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7일,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 용두리 지령마을에서 유중권의 3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9세가 되던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로 맺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유관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집안에서 자랐고, 부모님은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공주에 와 있던 미국인 선교사의 부인인 사 부인이 유관순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1916년 15세의 나이로 경성 이화 학당 보통과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은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화 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고등과로 진학한 유관순은 1919년 1월 하순,

 

조선 제 26대 임금인 고종(1852~1919) 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되었고

 

일본에 대한 미움과 나라 잃은 서러움까지 한꺼번에 느끼게 되었습니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이는 어느 민족이나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들의 힘으로 나라를 세우고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이 다니던 이화학당에서도 교사와 상급생들이 비밀리에 3·1 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종로의 탑골 공원에서 오후 2시에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했는데

 

민족 대표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리집이었던 태화관으로 갑작스레 모임 장소를 바꿨고 독립 선언식을 가졌지만, 

 

곧바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모두 연행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정재용 이라는 청년이 탑골 공원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 큰 소리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고

 

군중들은 박수와 함께 우렁찬 함성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경성(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작해 가까운 교외로 까지 만세 시위 행렬은 번져 갔습니다.

 

이 시위는 독립 선언서에서 강조한대로 질서를 유지하며 평화롭게 이루어졌고 그 누구도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1919년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 광장에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고향으로 내려 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각 학교별로 독립운동을 하러 온 학생들도 모여있었습니다.

 

오전 9시 조금 지나면서 군중들은 태극기를 앞세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남대문 쪽으로 행진해 나갔습니다.

 

 

 

일제는 1919년 3월 10일, 학생들이 모일 장소와 기회를 처음부터 없애 버리기 위해 모든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유학생들은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바로 이 학생들이 3·1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관순 열사 또한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고향인 용두리에서도 만세 운동을 위해 사람들이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군의 큰 시장이었던 갈천면(현재의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하기로 결졍했습니다.

 

아우내 장터는 5일마다 열리는 큰 시장이었는데, 천안군 뿐만 아니라 청주, 진천 등에서도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여러 소식이 오고 가는 자리였습니다.

 

오후 1시가 되자, 유관순을 비롯한 고향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 를 외치기 시작했고 마을 예배당 책임자인 조인원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헌병 주재소의 헌병들과 천안에서 지원 온 헌병 분견대원들은 군중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대었고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남의 나라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고 평화롭게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휘둘렀던 것입니다.

 

일본 헌병은 계속해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결국 유관순을 비롯해 많은 식구들이 붙잡혀 갔고 시이 운동 주동자의 집이라는 이유로 유관순의 집에도 불을 질렀습니다. 

 

 

 

1919년 5월 9일 유관순 열사는 공주 지방 법원에서 1심 재판으로 징역 3년 형을 받게 되었고 항소를 한 뒤 6월 30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후 애국지사들을 가두고 고문하는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지게 되었고 1920년 10월 12일 그 동안의 심한 고문과 영양실조, 칼에 찔린 상처의 고름 등 쇠약해진 몸을 추스르지 못한 채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화 학당의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로 가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이라도 내놓으라고 했지만, 일본은 죽은 유관순의 시신마저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프라이 교장은 시신을 넘겨주지 않으면 미국을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에 이 만행을 모두 알리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했고 결국 아래의 조건과 함께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넘겨받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의 시신에 관한 사실을 바깥에 알리지 말것, 장례식은 조용히 치를 것.

 

유관순의 시신은 이태원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훗날 일본이 이 공동묘지를 모두 파헤쳐 군사용 땅으로 사용했기에 지금은 유관순 묘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순국 선열 유관순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1967년에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유관순 생가 옆에 유관순 기념 교회(매봉교회)가 세워졌습니다.

 

1974년에는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 여자 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1988년에는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에 위치한 독립 기념관에 유관순 열사 애국 어록비가 세워졌습니다.

 

천안 유관순 열사 기념관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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