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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만해 기념관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6. 2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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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님의침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정옥이었고 아명은 유천입니다.

 

한용운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한 선비 가문이었고 1884년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의 역사책 통감을 비롯 소학 등을 모두 떼어 마을에서는 신동이 났다고 한용운을 칭찬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담은 대학을 읽던 한용운은 그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을 정도로 이미 나름대로 경전을 해석할 수 있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14세 되던 1892년 집안에서 정해준 전정숙과 결혼했고 16세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1895년 을미사변을 거치며 한용운이 살던 충청도 홍주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고, 싸움 도중 아버지 한응준과 형 한윤령을 잃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던 한용운은 19세에 한성으로 떠났고 그러던 도중 앞날을 위해서는 실력을 기르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에 있는 속리사(현 법주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용운은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 백담사에 있는 탁몽성 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일을 하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연곡 스님이 가져다 준 음빙실문집과 영환지략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보다 넓은 세상을 직접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습니다.

 

하선하려는 찰나 사람들이 한용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며 조선 사람들을 괴롭혔던 일진회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한용운은 이 사건을 겪은 후 같은 동포끼리도 믿지 못하고 목숨마저 노린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1908년, 30세가 되던 한용운은 세계 문물을 더 알고자 일본 도쿄로 갔고 일본 스님의 도움으로 조동종 대학에 들어가서 불교와 서양 철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또한 측량 기기를 사들고 국내로 들어와서 한성에 명진 측량 강습소를 개설하고 우리 민족이 신식 측량 기술에 대해 알고 절이나 개인 소유 의 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1911년 경상남도 양산에 위치한 통도사에 간 한용운은 팔만대장경을 주제별로 요약한 불교대전을 완성했고 이내 불교계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1913년 한용운은 조선 불교 유신론과 불교대전 국한문 편찬을 하고, 전국을 다니며 젊은 승려들을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한용운은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려 노력했고 천도교, 기독교 인사들과도 만나며 3 1 운동 독립 선언서 작성에도 참여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념 연설을 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경찰에 붙들려 마포 경찰서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용운은 조선 사람이 조선 민족을 위해 스스로 독립 운동을 하는데 일본 사람이 무슨 재판을 할 수 있냐며 늘 당당했습니다. 

 

징역 3년 동안 간수들에게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도 한용운은 한결 같은 모습으로 좌선을 했고 1921년 마침내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1923년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앞장섰고, 1924년 조선 불교 청년회를 조직했습니다.

 

1925년에는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십현담 주해를, 백담사에서 시집 님의 침묵을 완성했습니다.

 

한용운이 살아온 삶을 온전히 담은 시집이 바로 님의 침묵입니다.

 

1933년 53세 때 한용운은 유숙원과 두 번째 결혼을 했고 성북동에 생애 첫 집인 심우장(소를 찾는다, 불교에서는 소를 깨달음의 경지라고 뜻함)을 지었습니다.

 

1935년부터는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그 뒤에도 신문 연재 소설 후회, 박명 등 작품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신경통, 각기병, 영양실조 등으로 몸이 약해진 한용운은 청소를 하던 중 갑자기 쓰러졌으나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1944년 6월 29일 중풍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만해 기념관 *출처: 광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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