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김구 독립운동가 백범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써 고함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6. 2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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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김구는 1876년 음력 7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구의 어렸을 때 이름은 창암이었습니다. 집안의 한 어른이 양반들이 쓰는 갓을 쓰고 나갔다가 이웃 마을 양반들에게 들켜 갓을 찢기는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본 김구는 과거에 합격해서 양반이 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김구가 살던 동네에는 서당이 없었지만, 김구의 의지가 굳은 것을 본 아버지는 이웃 마을에서 선생님도 모셔오고 서당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구는 학식과 이름이 높은 선생님에게 글을 배우고 싶었고 인연이 닿아 정문재 라는 이름난 학자에게 글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과거인 경과가 해주에서 열려서 김구는 과거 시험을 보러 갔으나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이야기를 들었고 김구가 낸 시험지는 시험관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1893년 18세가 되던 해 황해도에는 동학이 널리 퍼졌고 김구는 동학의 길로 들어가 이름을 창수라 고쳤습니다.

 

팔봉 접주가 되어 해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만주로 건너간 김구는 김이언의 의병 부대를 찾아가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일본과 싸울 의병이 되었으나 강계성을 손에 넣는 의병활동에도 실패하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1895년 10월에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 소식을 들은 김구는 굳이 청나라로 갈 필요가 없이 국내의 사정을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막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죽이게 되었고, 결국 일본군에 붙잡혀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1897년 8월 26일 김구의 사형선고 시행을 앞뒀을 때 고종 황제가 김구 사건의 전말을 알고 어전 회의를 열어 사형을 중지시키기로 결정했고 전화로 연락이 와서 김구의 사형 집행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8월 23일 한성과 인천 사이의 전화가 설치된 덕분에 김구는 사형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사형 집행을 중지시킨 것을 보아도 나라에서 나를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생각한 김구는 감옥을 탈출했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습니다. 

 

김구는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 아이들에게 글 공부를 가르쳤고 이름 또한 김구로 고쳤습니다.

 

 

 

1910년 11월 김구는 신민회로부터 서울에서 비밀 회의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고 황해도 대표로 희의에 참석했습니다. 이듬해인 1911년에는 애국 지사들을 모두 체포했던 105인 사건으로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징역 17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12년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김구의 형량은 5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1914년 김구는 감옥을 나오게 되었고 백범(白凡)으로 붙였습니다. 백범은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에서 백을, 평범한 사람을 뜻하는 범을 따서 가장 낮고 평범하다는 의미입니다.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났고 김구 또한 상하이로 망명해 여러 애국지사들과 교류했습니다. 1926년에 조직한 한인 애국단에서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을 했고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거사가 성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구는 동포들의 불안을 잠재우고자 도쿄 사건과 홍커우 사건 모두 본인 책임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난징 정부는 김구를 지지하고 보호하겠다고 하며 한국 독립군 학교에 지원까지 하였습니다.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이자 광복군 창설 위원회 위원장이 된 김구는 한국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수년 동안 노력해서 조국에 들어가 싸울 준비를 했던 광복군은 1945년 8월 10일 미국의 폭격을 받은 일본이 곧 항복을 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일행은 귀국을 했고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네 나라가 5년간 신탁 통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대하며 통일 정부를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국제 연합 소총회에서는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김구는 1948년 4월 19일 평양으로 가 남북 협상을 마쳤으나, 미국과 소련 두 나라 모두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고 남북 협상은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김구를 만나러 왔고 결국 김구는 안두희에게 사살되었습니다.

 

 

 

사후

 

1949년 7월 5일 국민장을 치렀고 이봉창, 윤봉길이 묻혀 있는 효창 공원에 나란히 묻혔습니다.

 

1962년 3월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1969년 8월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고,

 

2000년 6월 26일 백범 기념관 건립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백범 김구 동상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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