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신사임당 다재다능했던 현모양처

오주부의 내돈내산 2023. 6. 30. 11:56
728x90
SMALL

[출처: 신사임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대기

 

신사임당은 1504년 10월 29일 강릉 북평촌(오죽헌) 외가에서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이씨 부인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씨 부인은 신사임당 밑으로 딸을 셋이나 더 낳아 딸 부잣집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인선은 신사임당의 아명입니다. 사임당은 후에 스스로 지은 호 입니다.

 

당시에는 여성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 풍습이 있어 많은 여성 문학가 및 예술가들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까지도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들은 계속 시중을 들 처녀를 요구했기 때문에 딸을 가진 부모들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대로 외출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1510년 7세가 될 무렵 안견의 화풍을 본받아 산수, 풀벌레, 포도 등을 그리기 시작했고, 외할아버지 이사온에게 글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인선이는 어려서부터 호기심도 많았고 손재주도 있어 옷감을 짓거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실력이 나날이 늘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 신명화가 한성에서 화첩을 구해서 인선이에게 주었는데, 인선이는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고 비슷하게 그릴 때까지 연구하고 따라 그리던 끈기 또한 있었습니다.

 

 

 

1519년 열여섯살 되던 해 인선은 소학에서 읽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의 정성을 본받고 싶어 호를 사임당(師任堂) 으로 지었습니다. 사는 스승과 본받다 라는 의미이고, 임은 태임의 임 자를 땄고, 당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열아홉 살 되던 해, 신사임당은 아버지 신명화가 한성 친구 집에 들렀다가 우연히 만난 이원수를 보고 마음에 들어 사임당의 신랑감으로 정했고 혼례를 치렀습니다.

 

고려 개국 공신인 신숭겸의 18대손이었던 아버지 신명화는 딸의 혼례 이후 석 달만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임당은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치고 한성에 있는 시댁으로 향했고 1524년 첫 아들 선을 낳았고, 1529년에는 둘째 딸 매창을 낳았습니다.

 

또한 1530년에는 셋째 아이 번을 낳았고, 29세에 넷째 아이, 그리고 33세에는 선녀가 안겨 준 사내아이 태몽을 꾸었고 다섯째인 율곡이이 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이를 낳고 몸조리를 하던 사임당은 봄이 되어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더더욱 소중하게 생각되었고, 자신이 아이를 잉태하여 낳은 것도 우주의 한 가지 이치라는 것을 깨닫고 그린 그림이 바로 초충도 입니다.

 

신사임당은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 배우려는 마음을 갖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특히 총명했던 다섯 째 이이는 열 세살에 진사 시험에 장원 급제하였고, 훗날 이황의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의 주요 유학 사상가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신사임당은 39세에 막내아들 우를 낳았으나 몸이 약해져 자리에 눕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남편 이원수가 수운 판관이 된 다음 해인 1551년 삼청동으로 이사했고 이원수가 평안도 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됨에 따라 첫째 아들 선과 셋째 아들 이가 함께 따라갔는데, 신사임당은 평안도에 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해 5월 17일 새벽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죽헌

 

도로명 주소 : 강원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신사임당과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난 집입니다.

 

[출처: 오죽헌 - 문화재청]

 

 

 

 

728x90
LIST